300미터 남짓한 낮은 구릉일지언정 청계산이 살짝 숨겨주고 있는 청룡사터는 그래도 ‘복 받은’ 폐사지입니다. 강원도 횡성에서 흘러드는 남한강 지류인 섬강가 흥법사터의 경우는 절터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말 그대로 폐허입니다.
발아래 섬강을 두고 따스한 햇볕이 드는 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해도, 이미 주민들의 ‘생활터전’이 돼버린 까닭에 여느 폐사지에서의 분위기를 기대하기란 어렵습니다. 곳곳이 상처투성이인 석탑(보물 제464호) 한 기와 몸돌을 잃은 진공대사탑비(보물 제463호)가 남남처럼 멀찍이 떨어져 서있을 뿐 주변은 온통 비닐하우스와 밭입니다.
관심을 끌지 못하고 오랫동안 버려지다 보니 그리 된 것일 테지만, 한때는 많은 걸출한 석조 문화재를 보유한 첫손 꼽히는 절터였던 모양입니다.
일제강점기 이곳에 있던 염거화상탑(국보 제104호)이 서울로 옮겨지고, 진공대사탑(보물 제365호)과 탑비의 몸돌이 일본으로 반출되어 절터는 만신창이가 되고 맙니다. 일본으로부터 다시 되찾아오긴 했으나,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살기 좋은’ 서울에 남겨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절터 자체가 이미 대부분 깎이고 헐렸을 뿐만 아니라, 듣자니까 석물들이 놓인 공간을 제외한 상당 부분이 사유지라고 하니 본모습을 되찾기란 어려워 보입니다. 그토록 힘겹게 생명을 이어온 이곳이 어쩌면 대운하 공사의 첫 희생양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마 남한강의 본류가 아닌 지류에까지 콘크리트로 도배할까 싶다가도, 내륙 물류기지다, 관광지다 해서 마구잡이 공사가 시작될 양이면 강과 바로 인접한 곳이 무사하지는 못할 것 같아서입니다. 더욱이 절터의 상당 부분이 사유지인 이곳임에랴.
그리 된다면 흥법사터는 또 한 번의 폐사를 맞게 되는 셈이고, 사진 한 장, 글 한 줄의 기억으로만 남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나마 절다운 호젓함이 남은 청룡사터와는 달리 더 이상 망가질 게 없는 폐사지의 숨통을 아예 끊는 일이 될 것입니다.
환경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대운하를 건설한다지만, ‘친환경적’이라는 그럴싸한 명분도 따지고 보면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자연환경 중에서 가장 약하고 모자란 부분이 사라지지 않도록 먼저 배려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발과 성장의 이름으로 들이대는 무시무시한 칼날이 맨 먼저 겨눌 곳은, 다름 아닌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버려진’ 것들이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섬강가 흥법사터에 더 정이 가고 애틋해 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빈 절터뿐만 아니라 남한강 주변에는 호젓한 풍광을 뽐내는 곳이 참 많습니다. 이는 곧 대운하로 인해 사라질 운명이라는 뜻입니다.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2008.05.29 14:07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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