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원 "지식인은 사회를 따끔따끔 찌르는 존재"

[인터뷰] <시장권력과 인문정신> 펴낸 문학평론가 이명원

등록 2008.06.02 14:38수정 2008.06.02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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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이명원 문학평론가는 최근 펴낸 <시장논리와 인문정신>에서 시장논리와 자본이 최우선 가치인 이 시대에 왜 인문정신이 필요한가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이명원 문학평론가는 최근 펴낸 <시장논리와 인문정신>에서 시장논리와 자본이 최우선 가치인 이 시대에 왜 인문정신이 필요한가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 컬처뉴스

이명원 문학평론가는 최근 펴낸 <시장논리와 인문정신>에서 시장논리와 자본이 최우선 가치인 이 시대에 왜 인문정신이 필요한가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 컬처뉴스

먹고 살기 흉흉한 세상에서 주린 배를 달래려 라면 물을 맞추는 일보다 소설책 한 권 드는 일이 더 중요한 것인가. 이명원 선생을 찾아간 것은 그런 궁금함 때문이었다. 세상사람 사는 행태도 가지가지고 그 사람들이 무리지어 만들어낸 분야, 분과도 퍽이나 많은데 왜 인문학을 한다는 사람들은 유독 자신들의 분야가 여타 모든 분야의 내적 근거가 되는 양 구는 것일까? 이들의 밥그릇이 겸허해진다는 건 정녕 인류 종말의 묵시록이고 세계사적 위기일까?

 

다행히도 이들의 목소리는 어둠에 은신하여 귓전을 알짱대는 모깃소리마냥 대낮 같은 현실에서는 좀처럼 제 소리를 내지 못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인문학계라는 어둔 방에서는 그들의 서가가 인류 지성의 보고이고 인간 정신의 보루라며 윙윙거린다. 살아남기 위해 라면봉지를 뜯는 손목을 지그시 끌어당겨 책 한 권 쥐어주던 이를 다시 만나기 위해 자장면 집 위층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 최근 <시장권력과 인문정신>이라는 책을 냈다. 상당히 교과서적인 제목에다 조선 선비 냄새마저 배어 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특히나, 모든 것을 시장에다 양도하고 시장 논리에 따라서 국가 정책은 물론 문화 정책이나 인문 정책을 맡기자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인문 영역이나 문화 영역이라고 하는 것에 시장 논리를 그대로 적용한다고 하는 것은 상당히 단세포적인 발상이다. 인문학의 위기나 문화의 위기를 심화시킬 뿐만 아니라 재생산 가능성을 어렵게 만든다. 이것이 이 책의 포커스다."

 

- 인문학이라고 하는 것도 분과 학문의 하나에 불과하지 않나. 인문학은 특별한가?

"인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삶의 의미를 묻는 것이고, 인간과 자연은 물론이고 문명의 근원적인 가치와 공생 가능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보면 아이엠에프를 기점으로, 삶의 근원을 묻는 질문보다 어떻게 하면 실용적으로 안락하게 살 수 있을까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경제주의 속에서 사람들은 점차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 자체를 던지지 않거나, 질문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하게 된 것 같다. 이런 사람들이 과연 얼마만큼 자기 삶의 의미에 대해 숙고하고 성찰하고 고민할 수 있겠는가. 나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인문정신이라는 것은 이런 차원에서 우리 삶을 원점에서부터 반성하게 하는 근원적 동기라 할 수 있다."

 

- 그렇게 중요한 일을 떠맡은 사람들의 발언이라는 게 그 집단을 넘어서서 사는 사람들 귀에는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어찌 생각하면 사는 데 하나도 안 중요한 소리를 저희들끼리만 심각하다고 떠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날이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샐러리맨들이나 일용할 양식을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허황되고 추상적으로 보인다고 할지라도 현안에 쫓기는 사람들이 고민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지식인이다. 지식인들은 이처럼 고민을 하라는 사회적 역할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일반적인 노동에서 면제되어 있다. 방금 질문은, 자기 전문성에 빠져서 지식인들 사이에서만 통용될 수 있고 지식인들만이 알아먹을 수 있는 언어와 문제의식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의미인 것 같다. 인문정신의 위기라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인문학자들의 밥그릇 문제가 아니냐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 바로 그것이 위기의 가장 큰 이유일 수 있다."

 

- 처음이 어땠는지 몰라도 어쨌거나 세상이 변했고, 그래서 인문학의 존재 근거가 처음과 같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지금 세상에서의 인문학의 존재 근거는 무엇인가?

"인문학의 존재 근거라고 하는 것은 대중적 차원에서 볼 때는 우리가 시를 읽고 소설을 읽고 아주 추상적이기 짝이 없는 철학책을 읽으면서 얻게 되는 비가시적 효과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삶의 의미를 찾는 방식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감정교육이다. 나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타인과 그것들로 구성되어 있는 공동체, 인간 바깥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자연, 세계의 순환 고리 속에서 모든 것이 서로 협동하고 있다고 하는 감수성을 계발하는 것이 감정교육이다. 이 중에서도 공감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데, 나와 타인 사이의 친밀감, 합리적 소통을 넘어 선 정서적 차원의 소통이나 공감은 삶의 근원적인 가치이고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데 있어서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 그것을 무용지용의 인문학적 가치라 한다면 동시에 실사구시의 인문학은 이와 모순으로 보일 법도 하다. 이 둘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해야 하는가?

"실사구시라고 하는 것은 지금처럼 경제적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맥락과 유리되지 않되 삶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 탐구, 실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풍기라는 것은 바람을 일으켜서 시원하게 만드는 가시적 효용성을 갖고 있다. 상품 영역에서는 이러한 가시적 효용성이 분명하게 보인다. 하지만 인문학처럼 정신세계와 관련된 영역에서는 가시적 실용성이라고 하는 것이 노출되기 어렵다. 한편의 시가 한 사람의 삶의 의미를 변화시킨다고 하지만 과연 그랬는지는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는 빵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다고 해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면 삶을 단념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게 소위 말하는 무용지용이다. 경제적 효용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실제적으로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절망과 곤경 속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의 친화력을 느끼고 관계에 대한 기대를 만들어 내는 가치는 분명히 가지고 있다."

 

a  민예총 문고 여덟번째 작품으로 출간된 이명원 문학평론가의 <시장권력과 인문정신>

민예총 문고 여덟번째 작품으로 출간된 이명원 문학평론가의 <시장권력과 인문정신> ⓒ 로크미디어

민예총 문고 여덟번째 작품으로 출간된 이명원 문학평론가의 <시장권력과 인문정신> ⓒ 로크미디어

- 소설을 예로 들자면, '등단할 만한 작품'이라는 것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고, 문창과라는 것이 생겨나면서 지망생들이 글쓰기 도식을 전수받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비가시적이라지만 현실적으로 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이 그러한 비가시적 효과나마 가지고 있다는 데에 선뜻 믿음이 가지 않는다.

"문창과를 포함해서, 기법적 차원에서는 훈련을 많이 시키는데 기본이 될 수 있는 정신이나 태도 역할과 같은 부분에 대해서는 별로 훈련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건 사실이다. 문학 기술자나 기능공 비슷하게 되어 문제의식이 담기지 않은 작품들을 양산하다 보니 독자 대중들 편에서는 굉장히 한심하게 보일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작가들이 오랫동안 활동할 수 있겠느냐, 등단해서 단타로 한두 개의 작품이 출판사의 스포트라이트 때문에라도 알려질 수 있지만 장구한 시간 속에서 작가로서 자신의 존재 증명을 할 수 있느냐, 내가 볼 때 존재 증명할 수 있는 작가는 많지 않다.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뿐만 아니라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타인과 세계에 대한 성찰 능력이나 분석 능력이 없다면 문학 시장 안에서 자연스럽게 주변화되고 잊혀질 확률이 높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평들은 하나 같이 칭찬 일색이지 않나? 내가 평론가나 교수가 아니라 소설이 재미없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선생님께서는 여전히 소설 읽기가 재미있으신가? 

"소설을 읽는 일이 요즘 들어서는 재미가 없어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소설을 읽는 이유라고 하는 것은 상투성과는 다른 상상력이 있을 거라는 가정을 하면서 읽는 것이고 독자 입장에서는 이 작가가 나보다는 좀더 깊고 큰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작품을 읽어 내려가는데, 막상 읽고 나면 합리적 교양 수준에도 못 미치는 작품들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상상력을 촉진한다던가, 추상적이긴 하지만 감동을 준다던가 하는 요소도 빠진 경우가 많다."

 

- 그럼에도 소설의 가치라는 유효한 것인가?

"그래서 역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는 글을 왜 쓰는가 하는 식으로 작가 중심의 고민을 해 왔지만 반대로 독자는 왜 읽는가에 대한 고민을 작가들이 던져가면서 작업을 해야 할 시점이 왔다. 어쨌거나 읽혀지는 소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대중들이 단순히 문화적 쏠림 현상 때문에 읽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지식인들의 입장에서 상당히 천박해 보인다고 판단되는 텍스트라 할지라도 그 안에는 대중들이 지금 현실적으로 겪고 있는 고민과 문제의식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대중들의 정체성이나, 대중들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다고 판단되는 감정의 구조를 탐색할 필요가 있다."

 

- 하지만 창작자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자신의 예술적 자의식이 아닌가? 일본 소설처럼 대중의 기호에 따라 기획자와 작가가 협력해서 만들어 가는 소설은 선생님이 말하는 인문정신과 거리가 있지 않은가?

"소설가는 타인의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지 일인칭으로 자기 얘기 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기 얘기는 일요일 날 성당 가서 고해성사를 하면 되는 것이고, 소설가들은 '너의 문제'를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수의 작가들이 나 자신에 함몰돼 있다. 그런 점에서 우려스러운 것이 전업 작가라는 존재다.

 

예술가라는 길드 비슷한 공동체 안에 소속되어 있다 보니 그 공간 바깥의 영역에 대해서 무지하면서도 동시에 무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예술가 의식이라는 것도 여전히 보들레르적인 낭만주의, 보헤미안의 낭만에 빠져 있어서 일상적 감각 속에서 대중들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진다. 그런 부분에 대한 작가의 자기 고발이나 자기 성찰이 전제되어야 그나마 얼마 안 남아 있는 대중 독자들과의 소통이 가능할 것이다. 반면 대중 자체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열광할 필요도 없다. 한편에서는 대중들과 협력적 관계를 가질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 작가들이 해야 할 일은 루쉰처럼 채찍질을 하는 것이다. 고립을 각오하더라도."

 

- 루쉰처럼 채찍질을 하라는 말과 관련하여, 소설가를 비롯한 창작자들도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역할을 부여받았다고 봐야 하는가?

"지식을 생산하는 방식이 다를 뿐 분명히 지식인이다. 예술가들 같은 경우는 사회적 현상에 대해서 감각적인 부정성을 가지고 있다. 쉽게 얘기하면, 감각적으로 혹은 감수성의 차원에서 심미적 비판을 자기도 모르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감수성의 변화나 혁신을 통해서 현실 상황에 대한 우회적 비판을 가하는 것이다. 미학적 텍스트가 대중들과의 직접적인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차단되어 있다고 판단된다면, 아룬다티 로이나 김곰치처럼 현장에 가서 상황에 대한 고발이나 증언적 기능을 담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경제적 보상이 다른 직업에 비해서 현격하게 불확실하기는 하지만, 예술가에 대한 사회적 존경이 적어도 상징적 차원에서라도 남아 있는 이유는 이러한 공적 역할 때문이다."

 

- 은거, 칩거하면서 자기 창작 행위에만 빠져 있는 사람들의 경우는 어떻게 되는가?

"아주 이기적으로 자기 작품에 집중하는 사람들도 결과론적으로는 공적 기여를 충분히 할 수 있다. 작품의 탐닉을 통해서 나 자신의 이기적인 차원에서 작품에 집중하는 사람도 그 작품이 대중들과의 소통 과정에서 전혀 다른 사회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 그러나 여전히 알 수 없는 건 오늘날 많은 수의 예술가들이 자기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예술가들도 상당히 많은 것 같다. 물론 가능한 태도이기는 하지만 올바른 태도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예술가들더러 지식인이 되라는 것은 과거처럼 계몽적 지식인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지식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써 내려가고 있는 한 편의 작품이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나, 현실에 있어서 사적 의미도 있겠지만 공적 기능을 담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글을 쓰라는 것이다."

 

- 하지만 의지를 가지고 공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대중들과 소통이 잘 안 되는 것 같다. 한 마디로 재미없다는 건데 감수성도 처진 느낌이고 비장하기만 해서 지루하기 짝이 없다.

"소통에 실패했다는 것은, 작가들이 문화적 코드를 형상화할 수 있는 방법의 개발에서 실패했다는 것을 말한다. 아무래도 그런 상황들이 가중되다 보니까 소설가나 시인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의 직업적 명사, 보통명사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아지는 것 같다. 왜 글을 쓰느냐 질문을 던지면, 과거 같으면 어떤 의미가 있어서 쓴다고 했을 사람들이 요새는 나는 소설가이고 소설 쓰는 것이 내 직업이기 때문에 쓴다는 식의 반응을 하는 경우가 많다. 자기 작업에 대한 예술적 자의식이 많이 허약해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 선생님 개인사와 관련하여, 그간의 글쓰기와 발언이 스스로의 인문학적 실천이었다면, 그 실천의 방식에 있어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이 있다. 선생님의 싸움은 늘 스스로 전장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졌는데, 인문정신이라는 것은 싸움터 밖에서 논평하고 훈수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인가, 안에서 싸울 수는 없는 것인가. 단적으로 말해 좀더 세련된 싸움의 방식은 없었는가?

"세련된 방식으로 싸운다는 것은 우리에게 능란한 처세술을 요구한다는 말이 된다. 그게 하나의 함정일 수 있다. 내부에서 끝까지 싸워야 한다, 세련된 방식으로 싸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를 굉장한 폭력성으로 느끼는 집단들이 항존하고 있다. 싸우고 싶어서 싸운 것은 아니었지만, 싸우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그 싸움의 과정 자체가 과연 생산적이냐 소모적이냐 하는 것이다.

 

나는 결국 대학에서 나오게 되었는데, 대학 안에서 싸움을 계속한다는 것도 물론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교수로서 그 안에서 발언할 수 있는 힘도 있고 장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검열이라는 게 끊임없이 생겨나게 될 것이다. 세련되게 싸우기 위해서 기회주의적 처신도 적절히 해야 할 것이고 공동체의 룰에 순치되는 과정도 있고 그런 반면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을 학문적으로 발현하기도 힘들게 되는 상황도 있을 것이다. 인문정신에서 안팎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문학이나 학문의 영역이라고 하는 것은 고민이 만들어지고 뻗어나가는 장소를 따라 이동하는 것이지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 책이라는 상품은 인문정신이란 것도 시장으로 수렴되지 않고서는 소통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나 싶다. 인문정신에 관한 글을 써가며, 이것은 이상에 불과하다거나 시장이라는 거대한 현실 속에서의 한계를 인정하며 글은 글일 뿐이라는 생각은 해 본 적 없는가?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한다면 굳이 글을 쓸 필요가 있겠는가. 문자라고 하는 게 낡아 빠지기도 했고, 또 시장 안에서는 열등한 상품인 게 사실이다. 그래서 상품 기능보다는 미디어로서의 소통에 대한 희망이나 기능 때문에 책을 내는 것이다. 문자를 가지고 하건 다른 매체를 가지고 하건 자기가 주장하는 바가 즉각적으로 달성되리라고 꿈꾸는 예술가나 지식인들은 거의 없다. 계속 발언을 하는 것은, 희망이나 기대는 누적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루한 누적의 시간이 계속되다 보면 갑작스럽게 형질 전환을 하는 순간이 오는데 그때에 대한 기대 때문에 이런 작업을 하는 것이다.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은 등에와 같아서 글쓰기를 통해 끊임없이 따끔따끔 찌른다. 이것이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끝없이 각성시키는 기능도 있고, 잠수함 속의 토끼처럼 다른 사람보다 먼저 소리를 지르는 속성도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글쓰기는 도달할지 모르는 독자를 향하여 대양에 던진 유리병 속 편지와 같다. 절망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닿는다는 희망도 있는 것이다. 정확한 방향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떨고 있는 나침반 바늘처럼 떨림 속에서 방향에 대한 전망을 가지고 그 속에서 작업을 해 나가는 게 글을 쓰고 고민하는 이유가 아닌가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컬처뉴스>(http://www.culturenews.net)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2008.06.02 14:38ⓒ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컬처뉴스>(http://www.culturenews.net)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시장권력과 인문정신

이명원 지음,
로크미디어, 2008


#이명원 #시장권력과 인문정신 #인문학 #지식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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