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밤에서 시를 낭송하고 있는 모습. 카메라가 물짰던지 인물이 제대로(?) 반영이 되지 않았다.
안병기
연습이 지독했던 만큼 후배들의 낭송은 상상이상이었다. 청중들도 서서히 달아올랐다. 무사히 시 낭송회가 끝났다. 문학강연 차 왔던 교수의 배웅을 나갔다가 둘이 막걸리를 몇 잔 주고 받았다.
교수를 보내고 나서 강당으로 되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지금쯤 다들 집에 갔을 것이다. 나 스스로 생각해도 후배들을 얼마나 혹독하게 다루었는가 말이다. 가서 뒷정리나 하고 가야지.
그러나 짐작과는 다르게 후배들은 단 한 명도 가지 않은 채 오롯이 촛불 아래 앉아 있었다. 내가 강당 안으로 들어서자 후배들이 박수를 쳤다. 우리는 촛불 아래 앉아서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사람은 단 한 순간 불타오려고 생을 사는지 모른다. 한 자루 촛불처럼.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의 생애에서 단 한 번이라도 타오르고 싶은 사람은 자신의 삶 깊숙한 곳에 언제든지 쓸 수 있는 자양분을 미리 저장해둘 일이다.
할부는 쉽게 갚지 못한다결국 나는 시낭송회 때문에 백수로서는 주제넘을 만큼 많은 빚을 졌다. 입장권을 팔면서 상징적으로 100원을 받긴 했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에 지나지 않았다. 마이크 설치비를 비롯한 기타 비용들은 어찌 어찌 갚았다. 그러나 시중에 있는 인쇄소의 반의반도 되지 않는 비용으로 교도소 작업과에서 찍은 팸플릿과 엔솔로지 값은 도저히 갚을 도리가 없었다.
다행히 인쇄물을 맡기면서부터 쌓기 시작한 임이택이란 교도관과의 친분이 크게 도움이 됐다. 그는 나의 처지를 이해하고 할부로 끊어나가도록 조처해주었다. 교도소와 거래를 한 것도 처음이지만 할부로 돈을 갚을 수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뿐만 아니라 가끔 연락해서 "동생 동생" 하면서 밥과 술도 사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내 할부인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시 낭송회가 보여준 커다란 반향에 고무된 나머지 그때 이후로 해마다 시 낭송회를 개최했던 것이다.
게다가 동인지 발간이라든가 시 낭송회를 위한 엔솔로지 발간 등으로 내 빚은 자꾸만 늘어 갔다. 그러나 어쩔 것이랴! 우리네 생 자체가 마음의 빚이든 금전적 빚이든지 간에 누군가에게 진 빚을 끝없이 갚아 나가야 할 할부 인생인 것을!
할부는 쉬 갚지 못한다. 이것이 내 스물한 살의 젊은 날에서 얻어진 교훈이었다. 오 마이 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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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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