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표지
황금가지
TV에서 기인(奇人)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시청하다 보면 예닐곱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가 칠판을 가득 메운 단어와 숫자를 쓱 훑어보고 막힘없이 줄줄 외우는 장면이 나온다. 그모습을 본 시청자들은 "천재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저럴 수 있지?" 하고 감탄사를 연발한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걸까? 아무런 의미도, 연관성도 없는 숫자와 단어들을 어떻게 쓱 훑어보기만 하고 정확히 기억해낸 걸까?
기억력 천재는 없다이스라엘 태생의 에란 카츠는 500자리 숫자를 한 번 보고 기억해내는 경이적인 기억력의 소유자로 기네스북도 인정한 기억력 천재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자신은 결코 천재가 아니라고. 실제로 그의 어릴 적 학업 성적은 그리 우수한 편이 아니었고 기억력도 평범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고 부단히 기억술을 연마해 마침내 세계 최고의 기억력 천재가 되었다.
흔히 "기억력은 타고난다"거나 "나이를 먹으면 기억력이 감퇴한다"는 따위의 고정관념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에란 카츠에 의하면 좋은 기억력, 나쁜 기억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관심의 많고 적음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예컨대 전화번호 외우는 데는 소질이 없지만 야구경기 기록에 대해선 귀신처럼 꿰고 있는 사람의 경우를 보자. 그는 결코 기억력이 나쁜 것이 아니라 전화번호보다 야구경기 기록에 좀더 관심이 많을 뿐이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가 열쇠를 사용하는 횟수는 한 달에 150번 정도라고 한다. 만약 한 달에 10번 정도 열쇠를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을 못한다고 가정하면 150번 가운데 140번 성공하고 10번 실패한 셈이다. 무려 95%에 이르는 높은 성공률이다. 그러나 당사자는 자신의 기억력이 형편없다고 자책할 게 분명하다. 이처럼 기억력에 관한 왜곡된 편견은 95%에 이르는 놀라운 성공률을 자랑하는 사람조차 자신의 기억력을 불신하게 만든다.
기억력은 상상력의 다른 이름
그렇다면 누구나 에란 카츠처럼 기억력의 달인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물론이다. 긍정적인 마음과 무한한 상상력만 있다면. 알고 보면 좋은 기억력이란 좋은 상상력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아래 무작위로 선택한 10개의 단어가 있다. 2분 동안 단어를 외우고 기억한 단어를 순서대로 적어보시오.침대, 물고기, 화분, 수박, 양초, 프라이팬, 오렌지, 자동차, 강아지, 치마. 아마도 어떤 사람은 사진을 찍듯이 이미지를 기억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각 단어의 첫 글자만 모아 "침물화수양프오자강치" 식으로 암기하는 등 각자 익숙한 방식대로 단어를 외울 것이다. 그러나 처음 3~5개 정도는 쉽게 외울 수 있지만 점점 단어가 늘어날수록 기억 회로는 뒤죽박죽 꼬이게 마련이다.
사실 이 테스트는 "몇 개의 단어를 기억했느냐"가 아닌 "어떤 방법으로 기억했느냐"를 알아보는 것이 그 목적이다. 누구든지 기본적으로 3~5개 정도는 쉽게 외울 수 있지만 일정 수준이 넘으면 제아무리 뛰어난 기억력 천재라도 헷갈릴 수밖에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어를 외우는 방법이다. 누구나 요령만 알면 단어의 갯수가 30개든 100개든 상관없이 거뜬히 외울 수 있다. 억지로 머릿속에 단어를 밀어넣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한꺼번에 단어를 전부 외우려 하지 말고 2개씩 따로 떼어내 연상작용으로 관계를 설정하면 훨씬 더 쉽다.
예를 들어 침대와 물고기란 단어를 따로 떼어내 침대 위에 물기로 미끈거리는 물고기가 비린내를 풍기며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을 연상하고, 또 물고기와 화분을 떼어내 2미터 길이의 물고기가 화분 속에 머리를 박고 꼬리는 하늘을 향하고 있는 모습을 연상하면 자연스럽게 침대 -> 물고기 -> 화분으로 이어지는 연상작용이 형성되어 단어를 쉽게 외울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이웃한 단어끼리 연상작용으로 관계를 설정해주면 10개가 아니라 100개, 1000개도 기억할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침대 위에 잠든 물고기" "머리를 화분에 박고 있는 물고기"처럼 비논리적이고 엽기적인 상상일수록 더 효과가 있다. 그 이유는 논리적인 상상보다 비논리적, 엽기적인 상상이 더 강렬하고 오래가기 때문이다.
물론 낚시하는 법을 안다고 해서 금방 물고기가 잡히지 않는 것처럼 암기하는 요령을 안다고 해서 금방 기억력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숙련된 어부가 고기를 잘 잡듯이 끊임없는 반복학습과 훈련 없이 암기의 달인이 될 순 없다.
키케로 장군의 기억법고대 로마의 키케로 장군은 열정적인 연설로 병사들의 존경과 감동을 이끌어내곤 했는데 그의 성공적인 연설 뒤엔 한 가지 비밀이 있었다. 그가 자칫 논점을 잃고 중언부언하기 쉬운 연설을 언제나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그리스인들이 사용하던 독특한 기억법 덕분이었다.
오늘날에도 널리 사용되는 키케로의 기억법은 정해진 공간이나 위치에 미리 이름이나 번호를 매겨 수납장처럼 기억을 넣었다 뺐다 하는 원리다. 다소 복잡한 개념이라 상세히 설명하긴 어렵지만 대략적으로 소개하면, 우선 각각의 공간을 지정하고 다시 그 공간 내에 위치한 물건들에 번호를 매긴 후 앞서 설명한 연상작용 원리를 적용하는 방법이다.
예컨대 먼저 집에 있는 네 개의 방을 선택한다. 거실, 침실, 부엌, 욕실이라고 하자. 그리고 이번엔 방 한 개마다 그 안에 있는 물건을 5개씩 종이에 적는다. 그럼 1번 방(부엌)에는 냉장고, 개수대, 전자레인지, 오븐, 식탁, 2번 방(거실)엔 오디오, 텔레비전, 책장, 소파, 전기스탠드…. 이런 식으로 물건의 목록이 만들어진다. 벌써 20개의 세부 항목이 생긴 셈이다.
바로 여기에 연상작용을 적용하는 것이 키케로의 기억법이다. 만약 내일 비디오테이프를 반납하기로 약속했다면 머릿속에 미리 지정해둔 냉장고를 찾아가 냉장고 문을 여는 장면을 상상한다. 그럼 거기엔 비디오테이프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제일 위엔 공포영화, 그 아래엔 드라마, 채소 서랍엔 액션영화가 놓여 있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면 좀더 생생한 기억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다음날 어제 계획한 일이 기억나지 않더라도 머릿속에 있는 냉장고의 문을 여는 순간 눈앞에 비디오테이프가 떠올라 희미했던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릴 수 있다.
기억술은 성공의 열쇠오늘날 기억력은 인생을 성공으로 이끄는 열쇠요 지름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주입식 교육의 비중이 큰 교육 환경에선 더 말할 것도 없다. 또한 점증하는 치매를 예방하는 데도 반복적인 기억력 학습이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세계 최고의 기억력 천재가 말하길 "기억력은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 후천적인 노력으로 얼마든지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한다. 500자리 숫자를 한 번 보고 기억해내는 에란 카츠도, TV 기인쇼에 나와 칠판에 적힌 단어를 줄줄 외우는 신동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라 부단한 반복학습과 훈련 끝에 암기의 달인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렇다면 더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물고기를 손에 쥐어주길 바라는 사람이 될지 아니면 물고기 잡는 법을 터득한 사람이 될지는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