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국과 한 판 붙어보겠다고? "꼬리를 내려라"

[역사소설 소현세자 62] 물거품이 된 북벌 의지

등록 2008.06.17 21:14수정 2008.06.18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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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폭포.  얼어붙은 박연폭포. 황진이의 주 활동무대였다.
박연폭포. 얼어붙은 박연폭포. 황진이의 주 활동무대였다.이정근


조선의 기생은 멋과 품격이 있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고 사내를 희롱할 줄도 알았고, '내 정령(精靈) 술에 섞여 님의 속에 흘러들어 구곡간장(九曲肝腸)을 마디마디 찾아가며 날 잊고 님 향한 마음을 다스리려 하노라'라고 지고지순한 사랑을 했고, 그 감정을 시로 읊을 줄도 알았다.


기생은 단순히 남자의 섹스파트너가 아니었다. 선비문화의 파생상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내와 맞담배질을 하며 시와 음률을 노래했고, 선비의 사유세계를 함께 노닐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이성과의 교류를 차단당해야 했던 조선의 선비들에게 기생 세계는 정신적인 해방구였으며 놀이터였다. 그 세계의 주인공 기생은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벗이었다.

청나라는 아예 기생문화가 없었다. 여자는 성적 대상이며, 사고파는 물건쯤으로 생각했다. 청나라는 1부 다처제가 근간을 이루었다. 권력 있고 돈 많은 사람들은 여러 명의 부인을 두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홀아비였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부녀자를 끌어가 그들의 노예시장에서 매매했으며 환향녀를 양산했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배꽃 떨어질 때 헤어졌던 님을 기다리는 여인의 마음이다. 지금까지도 남녀 간의 이별가로 이보다 더한 절창이 없다고 칭송을 받는 기생 매창이 유희경을 사모하는 시다. 이러한 매창이 죽은 지 불과 30년 전이다. 벽계수를 희롱한 황진이를 선배로 두고 있는 기생을 청나라 사람들이 성적 노리개로 취급하려 드니 기생들이 뿔이 난 것이다.

제지하는 관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역관


"철석!"

파열음이 밤공기를 갈랐다. 씩씩거리며 기생을 노려보던 정명수가 여인의 뺨을 갈긴 것이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변호길이 제지하고 나섰다.

"네놈은 뭐냐?"

귀방맹이를 돌린 정명수가 몽둥이를 가지고 와 변호길을 두들겼다. 변호길은 병조좌랑이다. 좌랑이면 간부급이다. 고위직에 있는 조선의 관리를 역관이 개 패듯이 팬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정은 꿀 먹은 벙어리였다. 오히려 정명수에게 물건을 더 바치자고 비국에서 품신했다.

"이번에 칙사가 와서 속은을 면제시켜 주고 기병도 감해 주었습니다. 마골대는 자신이 잘 주선해 준 공로라고 생각할 것이니 선물을 듬뿍 주어 고맙다는 뜻을 나타내소서. 그리고 역관 정명수에게도 물품을 주는 것이 온당할 것입니다."

삼전도 비.  송파구에 있다.
삼전도 비. 송파구에 있다.이정근

느긋하게 아침을 맞은 청나라 사신일행은 송파나루를 건너 삼전도비가 세워진 비각에 도착했다. 한강 상류에서 장대석을 끌어다 세운 비는 걸물이었다.

비 머리 이수(螭首)에 얹어진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고 있는 조각이 정교했고 하나의 비신에 몽고문자. 만주문자, 한자가 새겨진 것이 이채로웠다. 흐뭇한 미소를 머금으며 비를 살펴보던 초고로가 입을 열었다.

"조선 사람들이 자부심을 갖고 있는 집안의 호태왕비보다도 더 커 보이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안내하던 비변사 당상이 맞장구를 쳤다. 청나라 지린 통구에 있는 광개토대왕비는 6.39m이고 삼전도비는 5.7m이다. 초고로는 예부의 관리이며 역사학자다. 실측을 하고 그러한 말을 했는지 괜히 으스대기 위하여 그러한 말을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조선 관리는 청나라 사신 앞에는 무조건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었다.

"황제께서 조선에 은혜를 베푸신 것이 맞지요?"

뒷면에 '대청황제공덕비'라고 새겨진 비문을 바라보며 마부달이 이죽거렸다. 청나라는 군대를 끌고 와 조선강토를 짓밟았다. 무수한 양민을 끌어가고 세자를 볼모로 데려갔다. 청나라는 황제의 침략행위가 은혜라고 조선을 우롱했다. 마부달의 발언은 정신적인 외상을 입은 조선 백성들을 확인사살 하는 행위였다. 허나 조선 스스로 황제의 공덕을 기리는 글을 짓고 글씨를 새겨서 비를 세웠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비변사 당상이 머리를 조아렸다. 침략이 은혜라고 긍정 한 것이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마부달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로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삼전도비 문제가 일단락되었다. 치욕의 징표로 조선을 능멸하고 조선인의 자존심을 유린한 '대청황제공덕비' 문제가 끝난 것이다.

지화문.  남한산성의 정문이며 남문이다.
지화문. 남한산성의 정문이며 남문이다.이정근


"황제의 공덕비를 확인했으니 사냥을 하다 돌아가겠소."

삼전도 비를 점검한 마부달이 뜬금없는 요구를 하고 나섰다. 안내하던 비변사 당상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삼전도비에서 가까운 사냥터가 어디인가? 남한산성밖에 없지 않은가? 청나라 사람들이 남한산성에 들어가면 큰일이다.

"사냥을 하시려면 돌아가시는 길 아차산이 좋습니다. 아차산은 예전에 왕실 사냥터였습니다."
"아니오. 이곳에서 가까운 남한산성이 좋을 듯 싶소. 그리로 안내하시오."

명령이다. 당상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부달에게 남한산성은 제 손에 손금이다. 삼전도에 대치하고 있을 때 전술적으로 살펴봤고 협상 차 수없이 드나들던 산성이다. 산성에 입산한 마부달은 사냥은 하지 않고 성채를 둘러보았다. 마부달에게 사냥은 구실이었고 남한산성을 택한 것은 계획된 수순이었다. 모화관으로 돌아온 사신일행은 또 다시 방기를 불러들여 객고를 풀었다.

산성 수축을 추궁하는 청나라 사신

청나라 사신이 돌아가는 날. 인조는 병환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고 대소신료들이 모화관에 도열했다. 마부달이 승지 구봉서를 불렀다.

"당초의 약조에 산성을 다시 수축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가?"

"왜구를 방비하기 위하여 쌓았습니다."

"왜병이 만약 남한산성까지 쳐들어온다면 우리들이 어찌 군병을 이끌고 나오지 않겠는가? 산성을 두루 살펴보니 성기(城基)를 물려 쌓고 포루(砲樓)도 개설하였으니 어이된 일인가? 또한, 산성 안 네 곳에 곡식을 쌓아 두었고 추초(蒭草)도 저장해 놓은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너희 나라가 어떤 책략을 가지고 있기에 감히 이런 짓을 하는가? 절대 수축하지 말라는 말을 잊었는가? 산성을 헐어라."

"대국의 모든 명령은 지성으로 따라야 할 것인데 산성을 허무는 일을 어찌 감히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소방의 심정을 말씀드리면 지난해부터 왜적의 동태가 심상치 않아 한강 이남의 성을 수축하겠다는 뜻을 아문에 보고하였고 그 후로 남한산성을 약간 수리하였던 것이니 어찌 별다른 생각이 있었겠습니까."

"산성을 수축해서 무슨 간계를 이루려고 그렇게 급급히 수축하였는가?"

"소방의 뜻이 왜구를 방비하는 데에 있으니 대국에서도 수축하도록 권해야 할 일인데 어째서 의심하십니까? 산성이 깊고 외진 곳에 있지 않고 비(碑)를 세운 곳과 가까워 대국의 사신이 으레 비 있는 곳에 이르러 산성 근처를 왕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어찌 대국이 알지 못하고 사신이 보지 못한다 하여 그렇게 했겠습니까? 우리나라가 명나라를 섬겨 온 지 오래 되었는데 의주에 성로(城櫓)를 크게 설치하고 병사를 많이 배치했어도 명조에서는 의심을 하지 않았으니 이는 부모의 나라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의주의 성은 변방인 까닭에 헐어 버리게 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들이 금하는 것은 변성이 아니고 내지에 수축한 것이다. 부산 등지에는 이미 수축하도록 허락하였으나 지금의 남한산성은 헐지 않으면 안 된다."

이유 없다... "남한산성을 헐어라"

"대국의 명을 어찌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헐어버리는 것도 수축하는 일만큼이나 어려우니 다시 헤아려 주시어 새로 설치한 포루(砲樓)만 헐어버리게 해 준다면 고맙겠습니다."

"국왕께 아뢰어 남한산성을 허물도록 하고 우리가 국경을 넘어가기 전까지 치보(馳報)하도록 하라."

명령이다. 청나라의 명령에 조선은 실시하는 일만 남았다. 사신이 떠나고 승지 구봉서의 보고를 받은 인조는 비변사회의를 소집했다.

"남한산성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새로이 수축한 곳을 헐고 사신이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알려야 합니다."

비변사의 의견이다. 비변사는 나라의 안보와 국방을 책임진 관리들의 회의체다.

"남한산성을 허물도록 하라."

인조의 명이 떨어졌다. 이로서 성을 쌓고 군비를 재정비하여 청나라와 한 판 붙어보겠다는 조선의 결의는 휴지조각이 되었고 삼전도의 치욕을 안겨준 청나라에 대한 인조의 북벌 야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후, 인조의 생애가 다하는 날까지 청나라에 대한 복수 의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삼전도비 전문
대청(大淸) 숭덕(崇德) 원년 겨울 12월에, 황제가 우리나라에서 화친을 무너뜨렸다고 하여 혁연히 노해서 위무(威武)로 임해 곧바로 정벌에 나서 동쪽으로 향하니 감히 저항하는 자가 없었다. 그때 우리 임금은 남한산성에 피신하여 있으면서 봄날 얼음을 밟듯이, 밤에 밝은 대낮을 기다리듯이 두려워한 지 50일이나 되었다. 동남 여러 도의 군사들이 잇따라 무너지고 서북의 군사들은 산골짜기에서 머뭇거리면서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었으며 성 안에는 식량이 다 떨어지려 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대병이 성에 이르니 서릿바람이 가을 낙엽을 몰아치는 듯 화로 불이 기러기 털을 사르는 듯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죽이지 않는 것으로 위무를 삼아 덕을 펴는 일을 먼저 하였다. 이에 칙서를 내려 효유하기를 '항복하면 짐이 너를 살려주겠지만, 항복하지 않으면 죽이겠다' 하였다. 영아아대(英俄兒代)와 마부대(馬夫大) 같은 대장들이 황제의 명을 받들고 연달아 길에 이어졌다.

이에 우리 임금께서는 문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이르기를 '내가 대국에 우호를 보인 지가 벌써 10년이나 되었다. 내가 혼미하여 스스로 천토(天討)를 불러 백성들이 어육이 되었으니 그 죄는 나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황제가 차마 도륙하지 못하고 이와 같이 효유하니 내 어찌 감히 공경히 받들어 위로는 종사를 보전하고 아래로는 우리 백성들을 보전하지 않겠는가' 하니 대신들이 그 뜻을 도와 드디어 수십 기(騎)만 거느리고 군문에 나아가 죄를 청하였다.

황제가 이에 예로써 우대하고 은혜로써 어루만졌다. 한번 보고 마음이 통해 물품을 하사하는 은혜가 따라갔던 신하들에게까지 두루 미쳤다. 예가 끝나자 곧바로 우리 임금을 도성으로 돌아가게 했고 즉시 남쪽으로 내려간 군사들을 소환하여 군사를 정돈해서 서쪽으로 돌아갔다.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농사를 권면하니 새처럼 흩어졌던 원근의 백성들이 모두 자기 살던 곳으로 돌아왔다. 이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가 상국에 죄를 얻은 지 이미 오래 되었다. 기미년싸움에 도원수 강홍립이 명나라를 구원하러 갔다가 패하여 사로잡혔다. 그러나 태조 무황제께서는 강홍립 등 몇 명만 억류하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냈으니, 은혜가 그보다 큰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가 미혹하여 깨달을 줄 몰랐다.

정묘년에 황제가 장수에게 명하여 동쪽으로 정벌하게 하였는데, 우리나라의 임금과 신하가 강화도로 피해 들어갔다.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황제가 윤허를 하고 형제의 나라가 되어 강토가 다시 완전해졌고 강홍립도 돌아왔다. 그 뒤로 예로써 대우하기를 변치 않아 사신의 왕래가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 불행히도 부박한 의논이 선동하여 난의 빌미를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 변방의 신하에게 신칙하는 말에 불손한 내용이 있었는데 그 글이 사신의 손에 들어갔다. 그런데도 황제는 너그러이 용서하여 즉시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그러고는 먼저 조지(詔旨)를 내려 언제 군사를 출동시키겠다고 정녕하게 반복하였는데 귓속말로 말해 주고 면대하여 말해 주는 것보다도 더 정녕스럽게 하였다. 그런데도 끝내 화를 면치 못하였으니 우리나라 임금과 신하들의 죄는 더욱 피할 길이 없다.

황제가 대병으로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또 한쪽 군사에게 명하여 강화도를 먼저 함락하였다. 궁빈· 왕자 및 경사(卿士)의 처자식들이 모두 포로로 잡혔다. 황제가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소란을 피우거나 피해를 입히는 일이 없도록 하고 종관 및 내시로 하여금 보살피게 하였다. 이윽고 크게 은전을 내려 우리나라 임금과 신하 및 포로가 되었던 권속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눈·서리가 내리던 겨울이 변하여 따뜻한 봄이 되고 만물이 시들던 가뭄이 바뀌어 때맞추어 비가 내리게 되었으며 온 국토가 다 망했다가 다시 보존되었고 종사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우리 동토 수천 리가 모두 다시 살려주는 은택을 받게 되었으니 이는 옛날 서책에서도 드물게 보이는 바이니 아 성대하도다!

한강 상류 삼전도 남쪽은 황제가 잠시 머무시던 곳으로, 단장(壇場)이 있다. 우리 임금이 공조에 명하여 단을 증축하여 높고 크게 하고 또 돌을 깎아 비를 세워 영구히 남김으로써 황제의 공덕이 참으로 조화와 더불어 흐름을 나타내었다. 이 어찌 우리나라만이 대대로 길이 힘입을 것이겠는가. 또한 대국의 어진 명성과 무의(武誼)에 제아무리 먼 곳에 있는 자도 모두 복종하는 것이 여기에서 시작될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천지처럼 큰 것을 그려내고 일월처럼 밝은 것을 그려내는 데 그 만분의 일도 비슷하게 하지 못할 것이기에 삼가 그 대략만을 기록할 뿐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서리와 이슬을 내려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天降霜露 載肅載育
오직 황제가 그것을 법 받아 위엄과 은택을 아울러 편다./惟帝之則 竝布威德
황제가 동쪽으로 정벌함에 그 군사가 십만 이었다./皇帝東征軍士十萬
기세는 뇌성처럼 진동하고 용감하기는 호랑이나 곰과 같았다./殷殷轟轟 如虎如豼
서쪽 변방의 군사들과 북쪽 변방의 /西番窮髮 曁夫北落
군사들이 창을 잡고 달려 나오니 그 위령 빛나고 빛났다./執殳前驅 厥靈赫赫
황제께선 지극히 인자하시어 은혜로운 말을 내리시니/皇帝孔仁 誕降恩言
열 줄의 조서가 밝게 드리움에 엄숙하고도 온화하였다./十行昭回 旣發且溫

처음에는 미욱하여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재앙을 불러왔는데/始述不知 自貽伊戚
황제의 밝은 명령 있음에 자다가 깬 것 같았다./帝有明命 如寢之覺
우리 임금이 공손히 복종하여 서로 이끌고 귀순하니/我后祗服 相率而歸
위엄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오직 덕에 귀의한 것이다./匪惟恒威 惟德之依
황제께서 가상히 여겨 은택이 흡족하고 예우가 융숭하였다./皇帝嘉之 澤洽禮優
황제께서 온화한 낯으로 웃으면서 창과 방패를 거두시었다./載色載笑 爰束戈矛
무엇을 내려 주시었나 준마와 가벼운 갖가지 옷이다./何以錫之 駿馬輕裘
도성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이에 노래하고 칭송하였다./都人士女 乃歌乃謳

우리 임금이 돌아오게 된 것은 황제께서 은혜를 내려준 덕분이며/哀我蕩析 勤我穡事
황제께서 군사를 돌리신 것은 우리 백성을 살리려 해서이다./皇帝班師 活我赤子
우리의 탕잔함을 불쌍히 여겨 우리에게 농사짓기를 권하였다./哀我蕩析 勤我穡事
국토는 예전처럼 다시 보전되고 푸른 단은 우뚝하게 새로 섰다./金甌依舊 翠壇維新
앙상한 뼈에 새로 살이 오르고 시들었던 뿌리에 봄의 생기가 넘쳤다./枯骨再肉 寒荄復春
우뚝한 돌비석을 큰 강가에 세우니 /有石嵬嵬 大江之頭
만년토록 우리나라에 황제의 덕이 빛나리라/萬歲三韓 皇帝之休

작(作) 이경석. 서(書) 오준. 전(篆) 여이징.

#삼전도비 #남한산성 #기생 #황진이 #매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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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 <병자호란>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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