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집 고려대 교수가 16일 오후 서울 통인동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열린 긴급토론회 '촛불집회와 한국 민주주의'에서 발표를 하고 있다.
권우성
우선 최장집 교수가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최 교수는 현대 민주주의를 '대의제 민주주의'로 규정한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스스로 직접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출하여 그에게 통치를 위임함으로써, 대표로 하여금 통치토록 하는 체제"라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근본적 의미는 "인민의 자기통치" 즉 어떤 결정으로 인해 영향 받는 사람들이 그 결정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통치자와 피통치자를 일치시키는 통치체계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최 교수는 이런 치자와 피치자가 일치하는 '인민주권' 원리는 선험적 지식일 뿐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인민에게 완전한 주권을 부여하지 못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이를 제도화한 가운데, 인민주권이라는 가치를 끊임없이 지향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라는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은 사회 내에 존재하는 갈등을 공식적인 대표 체계 내에 포함시켜 갈등을 제도화하는 '제도적 실천'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 한국 정당체제는 사회의 부분적 갈등만을 포함하고 있는 '허약한 체제'다. 따라서 사회적 갈등이 제도화될 수 있는 정당체계를 바로잡지 않고서, 비제도적 방식인 운동에만 의존하는 것은 민주주의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촛불시위는 선발투수가 될 수 없는 '구원투수'일 뿐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와 직접 민주주의그러나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최 교수가 주장하는 대의 민주주의론과 가장 큰 대척점에 있는 민주주의론은 직접민주주의다.
직접민주주의 내에서도 다양한 이론적 경향이 존재하지만, 대체로 '인민의 자기 지배'를 민주주의 원칙으로 이해한다. 즉 최 교수와 같은 진보적 대의민주주의론자들은 대의제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인민주권 가치를 지향하는 데 머물지만, 직접민주주의론자들은 인민주권적 가치를 최대한 구현하기 위한 목적 하에서 대표제, 혹은 대리제를 받아들인다. 이 경우 중요한 것은 '대표자를 통한 정치'가 아니라, 국민(혹은 인민, people)의 직접 정치다.
물론 어느 입장에 서있느냐와 상관없이 의제의 복잡성·다양성과 규모의 확대로 인해 모든 사람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기 어려운 조건에서 불가피한 위임의 필요성은 인정하고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대표는 선거 때를 제외하고는 유권자의 의사에서 자유로운 반면, 직접 민주주의 시각에서 대리자는 항상 유권자의 의사에 종속되어야 한다.
따라서 대의제 민주주의 시각에서는 국민투표나 국민소환에 부정적이지만, 직접 민주주의 시각에서는 선출된 대표에 대한 국민 통제를 중요시 여긴다. 최장집 교수가 대통령 소환제를 "현실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그의 대의 민주주의론에서 기인하는 시각이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완전한가? '선거 실패'의 가능성최장집 교수는 "촛불집회로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민주주의제도를 넘어서는 어떤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그 제도를 더욱 강화하고 발전시키는 방법을 통해서"라고 주장한다. 민주주의를 대의제로 보는 입장에서는 이를 넘어서는 "대통령 소환제의 도입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국민은 선거를 통해 사회적 갈등을 반영하는 정당을 강화하고 발전시켜 해결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선거 실패'다. 보통선거권의 확대가 민주주의의 발전에 괄목할만한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선거제도 자체는 민주주의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선거는 크게 두 가지 지점에서 민주주의와 멀어진다.
첫 번째, 선거는 지배받는 사람이 지배해야 한다는 원칙, 즉 통치자와 피통치자가 일치해야 한다는 동일성의 원칙과 어긋난다. 선거는 항상 보통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을 뽑는데 이용됐다. 오늘날 그것은 조직력을 보유한 자, 선거자금을 감당할 수 있는 자, 언론의 주목을 끌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로 제한될 수 있다. 뽑는 사람은 민주화되었으되, 뽑히는 사람은 아직까지 '특별한 사람'이다. 이 지점에서 대의제는 민주정과 귀족정에 한 발씩 걸치고 있다.
원로 헌법학자인 국순옥 교수가 대의제를 "지배와 피지배를 계급적 수준에서 재생산하는, 즉 사회적 다수파를 정치적 소수파로, 그리고 사회적 소수파를 정치적 다수파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사회적 다수파에 대한 사회적 소수파의 정치적 지배를 가능"하게 만드는 제도라고 비판한 것도 이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제한된 선거기간 동안 후보자의 정치견해와 능력을 제대로 검증할 수 없다는 점이다. 공약을 제시하고 검증할 수 있는 메니페스토 운동이 전개되고 있지만, 당선자가 선거 시기에 제출한 공약을 준수하지 않는다고 어떤 제재가 가해지는 것도 아니며, 공약하지 않은 정책을 추진한다고 해서 제약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난 총선에서 쇠고기 수입과 경부운하 공약이 한나라당에서 빠져 있지만, 이를 통해 어떤 제재도 가해지지 않는 상황이 잘 보여준다.
따라서 유권자가 선택한 후보가, 사실은 그들이 기대했던 후보가 아니었을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선거 실패'다. 그러나 국민에겐 실패한 선거를 사후에 교정할 수 있는 어떤 권한도 없다. 소비자가 상품을 잘못 구입했을 때, 즉 '소비 실패' 시에는 교환과 환불, 혹은 리콜(recall)의 권리가 있지만, 잘못 선택한 정치인에 대해서는 어떤 권한도 없다.
'선거 실패'를 교정하기 위한 국민소환제(recall)와 같은 최소한의 보완장치를 "현실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것"으로 인식하는 최 교수가, 인민 주권적 가치를 어떻게 지향하겠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선출된 대표자의 '책임의 원리'인데, 이는 그가 강조하는 '제도적 실천'이라기보다 확인하기 모호한 '지도자의 자세' 같은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 여론과 의사'에 지도자가 책임을 갖고 반응해야 한다면, 그 국민의 여론과 의사를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 국민의사가 투입될 경로를 차단한 채, '정당을 중심으로 한 자율적인 결사체'에만 의존하는 것은 '선거실패'로 창출된 의회권력만 중요시하고, '조직되지 않은' 일반 국민의 목소리가 배제되는 경향을 피할 수 없다.
지금처럼 특정 정치세력이 압도적 비중으로 구성되어 있는 의회체계 아래에서 '정당정치', '제도적 실천'만을 강조해서는 현 상황에 대한 어떤 대안도 제시할 수 없다. 최 교수가 정당의 발전과 강화라는 원론적 입장 이외에 다른 현실적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프레임에 철저히 갇혀 있기 때문이다.
한국 민주주의사에서도 증명되듯이, 정당과 의회체계의 발전은 항상 거리정치, 비제도적인 국민의사가 분출된 결과로서 강제된 것이지 그 역은 아니었다. 거리정치를 '낭만주의적 정치관'을 확산시켜 '반정치주의적 정치관'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최 교수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지금 촛불을 든 시민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정치관은 낭만적이라기보다 참여적이며,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현실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고자하는 의지의 표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