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궂은 한자말 털기 (37) 존재 4

[우리 말에 마음쓰기 355] '가정이라는 게 아직 존재했던' 다듬기

등록 2008.06.29 17:08수정 2008.06.29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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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루카는 가정이라는 게 아직 존재했던 그 시절로 날아갔다 ..  《카롤린 필립스/전은경 옮김-눈물나무》(양철북,2008) 41쪽

 

 “어느 순간(瞬間)”은 “어느 때”로 다듬고, ‘가정(家庭)’은 ‘집’이나 ‘집안’으로 다듬습니다. “그 시절(時節)”은 ‘그때’로 손질합니다.

 

 ┌ 가정이라는 게 아직 존재했던

 │

 │→ 집이라는 곳이 아직 있었던

 │→ 집이라는 데가 아직 남아 있던

 └ …

 

 ‘있다’를 넣지 않고 ‘존재’를 넣는 자리를 가만히 살피면, 무언가 깊은 뜻을 담아내고 싶을 때이곤 합니다. 너른 뜻을 펼쳐 보이고 싶을 때이기도 합니다. 속생각을 들추어 내는 자리에도 두루 쓰입니다.

 

 ┌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숙고해 본다 (x)

 └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헤아려 본다 (o)

 

 ‘생각’을 하지 않고 ‘고찰(考察)’을 한다고 할 때, ‘헤아리’지 않고 ‘숙고(熟考)’를 한다고 할 때, ‘살펴보’지 않고 ‘고려(考慮)’를 한다고 할 때에도 으레 ‘존재’가 쓰이곤 합니다.

 

 한자말 한 마디가 쓰이며 다른 한자말하고 어울리고, 토박이말 한 마디가 쓰이며 다른 토박이말과 어울린다고 할까요. 미국말을 즐겨 섞어쓰는 분들은 미국말 한두 마디만 하지 않고, 온갖 미국말을 끝없이 집어넣듯, 한자말로만 생각을 하고 말을 하는 분들한테는 ‘존재’라는 낱말이 자기들 생각과 뜻과 얼을 담아내기에 한결 알맞다고 느끼리라 봅니다.

 

 오래도록 익숙해진 낱말이거든요. 어릴 적부터 익히 들은 낱말이고요. 둘레에서 흔히 듣는 낱말입니다.

 

 태어나서 자라는 터전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우리 마음밭을 다르게 일구게 되듯, 태어나서 자라는 터전에서 듣는 말에 따라서 우리 말밭도 다르게 가꿉니다. 일본 한자말이건 무슨 나라밖 말이고를 떠나서, 자기 생각과 넋을 이루어 가면서 받아들인 낱말로 글을 쓰고 말을 하기 마련입니다.

 

 아기일 때부터 어버이와 둘레 살붙이들이 ‘존재’라는 말을 쓰고 있다면, 또 텔레비전에서 ‘존재’라는 말을 손쉽게 들을 수 있다면, 또 학교에서 가서 배우는 교과서를 펼치며 ‘존재’라는 말을 늘 읽고 듣게 된다면, ‘있다’라는 낱말로는 자기 이야기를 펼치기에 걸맞지 않다고 느낄밖에 없습니다.

 

 ┌ 따뜻한 식구들이 존재한다 (x)

 └ 따뜻한 식구들이 있다 (o)

 

 있음, 삶, 함께함, 같이 지냄, 어울림, 부대낌, 살 섞음. 하늘에는 하느님이 있고, 땅에는 푸나무가 살아가며, 마을에는 이웃들이 함께합니다. 동무들하고 같이 지내고, 길고양이와 어울리며, 낯선 사람들하고 부대끼면서, 사랑하는 이와 살을 섞습니다. 우리는 다 함께 이 땅에 있습니다. 이 땅에서 삽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http://hbooks.cyworld.com (우리 말과 헌책방)
http://cafe.naver.com/ingol (인천 골목길 사진)

2008.06.29 17:08ⓒ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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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말 #우리말 #우리 말 #한자어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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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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