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먹인 이건희 "삼성전자 제품 11개가 세계 1위인데"

[방청기] 나란히 재판정에 선 삼성 부자... "증여세 적은 것 인정한다"

등록 2008.07.02 14:13수정 2008.07.02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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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장의 욕심으로 지금까지 진행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오늘 재판을 마칩니다."

 

민병훈 판사(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 부장판사)의 말이 끝나자, 장내 곳곳에서 "아"라는 조용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대법정 시계는 2일 새벽 0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10시간 40분에 걸친 6번째 '삼성재판'은 이렇게 끝이 났다.

 

이날 6차 공판에서는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을 비롯해 피고인 5명과 이 전 회장의 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 등 증인 5명까지 모두 10명에 대해 신문을 했다.

 

특히 이날 공판이 관심을 끈 이유는, 삼성 재판 후 처음으로 이건희-이재용 삼성 부자(父子)가 나란히 재판정에 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난해 말 한국사회를 들쑤신 삼성사태에 대한 이들 부자의 첫 법정진술이 예정돼 있었다.

 

삼성의 아버지와 아들, 재판정에 같이 서다

 

 이건희 전 삼성 회장
이건희 전 삼성 회장남소연
이건희 전 삼성 회장 ⓒ 남소연

1일 오후 1시 15분께 이재용 전무가 먼저 법정에 들어섰다. 증인 신분이었고, 방청석 중간에 자리를 잡았다. 소회를 묻자 담담한 표정으로 "(재판에) 충실히 임하겠다"고 짧게 말했다.

 

이어 1시 20분께 이건희 전 회장이 변호인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왔다. 방청석의 삼성 쪽 임원 등이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이 전무는 앉아있었다. 아들을 뒤로 하고, 아버지는 재판정 앞에 마련된 피고인석에 자리를 잡았다.

 

1시 30분께 재판이 시작됐다. 첫 피고인 신문은 김홍기 삼성 SDS 전 사장이었다. 삼성 경영권 불법승계 의혹 가운데 하나인 삼성 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저가 발행에 대한 특검과 변호인 사이의 공방이 이어졌다.

 

이 전무는 가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다소 긴장한 표정이었지만 차분했다. 이어 오후 2시 55분께 이 전무가 증인석에 섰다.

 

민 재판장은 증언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설명했고, 이 전무는 "증언하겠다"고 답했다. 특검쪽에서 증인 신문을 진행하려 하자 삼성 쪽 변호인단에서 "부친 앞에서 아들이 증언을 하는 것이 좀 그렇다"면서 "부자간 대질신문이 필요없다면 이 전 회장의 안정을 위해 (이 전 회장의) 퇴정을 허락해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이어 민 부장판사가 "이 전 회장의 의사에 달려있다"면서 "퇴정하고 싶다면 해도 좋다"고 하자 이 전 회장은 "그냥 있겠다"고 말했다. 이 전 회장은 법정에 들어서면서 아들과 법정에 함께 서는 소회를 묻자 "좋은 것이 아니다"며 불편한 심기를 나타내기도 했다.

 

이건희, "아들 증언 보겠다"... 이재용 '잘 몰랐다'로 일관

 

이후 1시간여 동안 아버지는 범죄 피의자 신분의 피고인으로, 증언석에서 특검의 신문을 받는 아들을 지켜봐야 했다.

 

특검 쪽은 이 전무에 대해 애버랜드 재산증식 과정과 그룹차원의 공모 여부, 자신의 재산 내용과 처분 관계 등에 대해 집중적으로 캐물었다. 하지만 이 전무는 대부분 질문에 대해 시종일관 "당시에는 몰랐다" "기억에 없다" "나중에 알았다" "나중에 들었다"라고 답했다.

 

신문 초반 '언제부터 주식이나 부동산 등 개인적으로 재산을 가지게 됐느냐'는 질문을 받자, 그는 "언제인지 딱히 잘 모르겠다"고 피해갔다. 이어 96년 12월 에버랜드 전환사채(CB) 인수사실과 1대 주주로 올라선 것 등에 대해서도 "당시 미국에서 공부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때"라며 "회장님의 포괄적인 지시로 자산관리인이 위임을 받아 했던 것"이라고 답했다.

 

삼성 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인수 과정이나 벤처업체인 e-삼성 등의 투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모르쇠로 일관했다.

 

마지막에 민 부장판사는 이 전무에게 자신의 경영권 승계문제로 이같은 상황까지 온 데에 대한 소회를 물었다. 그는 "법대 교수님들이 고발했을 때는 신경이 쓰여서 비서실에 문제가 없는지 물어보기도 했다"면서 "하지만 비서실에서는 '계열사 사장님들이 적법한 절차에 따라 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고 답했다.

 

이어 민 판사가 "법학교수의 고발이어서 법적으로 문제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도덕적으로도 다시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생각했다는 것인지"라고 되묻자, "지금 생각해 보니, 재판장 말씀대로 두 가지 다 생각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증인 신문이 끝나자, 이 전무는 이후 예정된 이건희 전 회장의 피고인 신문을 보지 않고 법원을 빠져 나갔다.

 

이건희 "인감도 안 만져봤다, 김용철 손만진 적도 없다"

 

이 전 회장은 아들인 이 전무의 증언 과정을 유심히 쳐다봤다. 또 하나의 경영수업 과정으로 생각하는 듯 했다.

 

이날 6차 공판의 증인 신문 하이라이트는 이건희 전 회장이었다. 오후 6시 15분께부터 특검쪽 신문이 시작되자마자 이 전 회장은 "귀가 좀 나쁘니, 천천히 크게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운을 뗐다.

 

그는 에버랜드 CB 발행과정과 지시 여부 등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따로 지시하지 않았다"면서 "(나는) 연구개발과 디자인, 5~10년 후를 내다보는 것에 신경을 많이 썼기 때문에 그런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전 회장은 경영권 승계나 차명계좌 관리 등은 이학수 전 부회장과 김인주 전 사장 등에게 맡겼다면서 "이는 관행이었고, 나는 인감도 만져보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삼성 사태의 계기를 제공한 김용철 전 법무팀장에 대해선 "이름은 알지만, 손을 만져본 적도 없다"면서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어 "(김 전 팀장의) 채용이나 퇴사 경위에 대해 모르며, 문제를 일으켜 언론에 나온 후 나중에 보고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특검과 변호인쪽의 신문이 끝난 후 민 부장판사의 질문이 이어졌다.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삼성 계열사는 어디인가"라고 묻자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이 제일 중요하고, 삼성증권은 미래에 중요한 회사"라고 답했다.

 

이어 민 판사가 "삼성전자는 어떤 점에서 중요한가"라고 질문하자, 이 전 회장은 "(삼성)전자에 나오는 제품 11가지가 세계 1위인데, 1위는 정말 어렵다"고 말했다. 이 전 회장은 이어 감정에 복받친 듯 이내 울먹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그런 회사(삼성전자)를 또 만들려면 10~20년 갖고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을 이었다.

 

삼성재판 출석하는 이건희-이재용 경영권 불법승계 및 조세포탈 혐의로 기소된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과 증인으로 나온 아들 재용씨가 1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 출석하고 있다.
삼성재판 출석하는 이건희-이재용경영권 불법승계 및 조세포탈 혐의로 기소된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과 증인으로 나온 아들 재용씨가 1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배재만-진성철
▲ 삼성재판 출석하는 이건희-이재용 경영권 불법승계 및 조세포탈 혐의로 기소된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과 증인으로 나온 아들 재용씨가 1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 출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배재만-진성철

 

"아들 재산증식은 '운'... 난 지배주주 아닌 경영자"

 

삼성생명에 대해선 "국민의 생명을 책임지는 회사"라며 "회사가 빨리 발전하면 적은 금액으로 무거운 질병을 다스릴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이 전 회장은 덧붙였다.

 

민 부장판사가 "아들 재용씨에게 재산을 상속하거나 증여하는 것을 생각해 봤나"라고 묻자 "당연히 생각해봤다"라면서 "최대한 상속하고, 그에 맞는 세금도 내야 한다"고 답했다.

 

이어 "국민들은 재용씨가 낸 증여세가 적다고 생각한다"고 재판부가 말하자, "알고 있으며, 인정도 한다"면서 "증여할 때 타이밍이 좋아 조금 투자하고도 주식이 많이 올라간 일이 있었다, 따로 지시하지도 않았고 완전히 운이었다"고 이 전 회장은 말했다.

 

향후 경영승계에 대한 질문에 대해, 이 전 회장은 "우선 자금 여유가 있어야 한다"면서 "또 재용이 본인의 능력이 닿아야 하고, 그 능력이 후계자로서 적당하지 않으면 절대 (그룹을) 이어받지 못한다"고 강조했다.

 

민 부장판사가 "스스로를 지배 주주라고 보나, 전문 경영인으로 보나"라고 묻자, 곧장 "나는 완전 경영자라고 생각하고, 지배 주주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라고 답했다.

 

경영권 확보 여부에 대해서도 "경영권 확보다 뭐다 말을 많이 하는데 100% 주식을 가져도 회사가 능력이 없으면 무슨 소용 있나"라면서 "경영권이라는 것은 회사 운영과 기술개발을 잘하고 회사가 건전하게 돌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1시간에 걸친 신문 시간 동안 이 전 회장은 가끔 물을 마시면서, 자신의 생각을 가감없이 쏟아냈다. 비록 법정이긴 하지만, 공개된 장소에서 일반 국민을 상대로 이렇게 오래동안 자신의 경영철학 등을 내비친 것은 처음이었다.

 

한편, 이날 재판정에서는 이 전 회장 이후 삼성그룹을 대표하는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과 이윤우 삼성전자 부회장도 참석해 처음부터 끝까지 공판을 지켜봤다.

 

이밖에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과 곽노현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도 증인으로 나와, 삼성 구조본의 공과(功過)를 비롯해, 오너중심의 기업지배구조의 폐해 등을 설명했다. 반대 측으로는 최학래 전 <한겨레> 사장과 손병두 서강대 총장이 증인으로 나와, 이 전 회장 등의 인간적인 면과 국가 경제에서 삼성이 맡은 역할 등에 대해 말했다.

#삼성특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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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의 원인은 대중들이 경제를 너무 몰랐기 때문이다"(故 찰스 킨들버거 MIT경제학교수) 주로 경제 이야기를 다룹니다. 항상 배우고, 듣고,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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