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공개강연은 출판기념회와 겸해서 진행됐다.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은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수기와 판결문, 한홍구 선생이나 박노자 교수와 같은 지식인들의 논평을 붙인 책이다.
철수와영희
한국현대사에 자주 붙는 말은 '격동'이라거나 '예측불가능성'이다. 짧은 시간 동안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이뤄냈다는 식의 찬사가 붙기도 하지만, 실질적인 의미는 그만큼 '미완성'되었다는 뜻이다. 한홍구 선생은 현대사의 현장에서 거대한 민중운동이 펼쳐지던 상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10.26이 일어났던 1979년 대학가의 데모 양상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유신 정권의 폭압적인 진압과 검열 때문이다. 77~78년에는 주동자 5명 정도가 모여서 한 학기에 한 번, 또는 분기에 2번 정도 데모팀을 꾸려 데모를 주도했다. 그러던 것이 1979년에 가서는 데모팀 자체를 꾸릴 수 없을 정도의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YH 사건이나 부마 사건 등이 터지면서 갑자기 정권이 두려움에 떨 정도로 민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유신정권은 1만명의 국민을 죽일 것이냐 집권을 포기할 것이냐의 선택의 기로에 몰렸다. 한홍구 선생은 김재규에 대해서 역사적 평가를 유보했지만, 적어도 부산과 마산에서 1만 명이 죽는 사태를 막기 위해 김재규가 박정희를 쏴 죽였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죽음은 광주로 미뤄졌을 뿐이었다.
6월 항쟁의 분위기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 86 아시안게임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정부는 기세등등해 저항세력을 벌집처럼 쑤셔대기 시작했다. 88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공안사범들을 뿌리뽑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당시 공안정국이 얼마나 지독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촛불시위의 연행자 연인원이 1000명에 육박한다는 기사가 크게 보도됐지만, 당시에는 하루에만 1200~1300명이 구속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건국대 사건이다. 뿐만 아니라 매일 건국대 사건 규모의 공안사건이 터져 조용할 날이 없었고, 저항세력은 바싹 엎드려 있었다.
당시 민청련 기관기 기자였던 한홍구 선생은 편집국 회의의 한 장면을 회상했다.
"어디 실내에도 100명 모인 곳 없냐? 1면에 실을 테니 어디 찾아봐라"그만큼 집회현장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틀 뒤 '박종철'이 죽었다.
2002년 미선이, 효순이 촛불시위 당시에도 월드컵 때문에 사람들이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런데 미군 군사재판에서 피의자들에 대한 무죄판결이 나오면서 민심이 들끓었다. 미군과 보수기득권의 논리에 따르면 "그 길을 하필 그 때 걸어간 미선, 효순이가 잘못됐다"는 말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2008년도 역시 여중생, 고등학생 수십 명이 시작한 조그마한 집회로 시작했듯이, 민심은 언제 어떤 방향으로 끓어오를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고 한홍구 선생은 말했다.
촛불은 만기를 잊어버렸던 '민주곗돈'이다한홍구 선생은 87년 민주화운동이 너무 고평가되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2002년 대통령 선거 때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는
"(민주화가 되고 나서) 지갑이 좀 느셨습니까? 살림이 좀 피셨습니까?"라고 자조적인 구호를 내건 것이다.
6월 항쟁의 정치적 성과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6.29선언을 통해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쟁취를 이뤄냈지만 민주진영의 분열로 권력은 다시 독재세력에게 넘어가 5공청산은 좌절됐고 3당야합으로 민주진영의 기반이 결정적으로 허약해지기 시작했다. 때문에 97년 대통령 선거 때 외환위기, 김현철 사건, 이인제의 500만표 획득, DJP 연합 등 한 건 한 건이 정권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었지만 이런 사건 5~6개가 합쳐져도 40만표 차이로 간신히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민주화의 성과에 대해서는 색다른 관점에서 접근했다. '머리로 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몸으로 체화한 민주주의'가 바로 2008년의 상황이라는 것이다. 한홍구 선생은 그 근거로 군대 내 사망사고 통계와 촛불 청소년을 들었다. 70년대와 80년대는 군 사망사고가 엄청난 사회문제였음에도 베일에 가려져 있는 성역이었다. 70년대는 한해 1000명 정도의 군 사망자가 생겼고 80년대에도 한해 600명 정도를 유지했다. 하지만 현재는 한해 100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는 사회가 민주화되었고, 사람들이 군대를 들여다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홍구 선생은 주장했다.
아이들은 '사과학습'(사회과학 학습의 준말로 대학에서 선후배 간에 이루어지던 사회현안과 역사에 대한 스터디)을 받지 않아 머리로는 민주주의를 잘 모를 수도 있지만, 아닌 것은 아니라고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고 권리의식이 충만했고 기성세대처럼 몸과 마음이 모순돼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작그만'으로 대표되는 기성 세대는 군국주의를 몸으로 익혔기 때문에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도 실생활의 민주화는 제대로 이루지지않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철저히 실생활의 민주주의를 화두로 내세우며 자유분방한 집회문화를 창출해내고 있다.
결국 진정한 민주주의는 시인 김수영의 말과 같이,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 김수영산문전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