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8.07.08 16:52수정 2008.07.09 10:46
제주에선 어디를 가든지 크고 작은 오름들을 볼 수 있다. 과거 제주 사람들에게 오름의 용도란 대게 마을의 바람을 막아주고, 소나 말을 방목하며, 초가를 잇는 데 사용할 띠와 억새를 공급하고,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매장할 묘지로 사용하는 정도였다. 오름에 사찰이나 사람이 살 집을 짓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제주시 삼양동 해안간 동쪽 끝자락에 있는 원당봉은 아주 오래 전부터 사찰을 품고 있다. 원당봉이란 이름도 과거 이곳에 있었던 원당사(元堂寺)라는 절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원당봉 진입로는 다른 오름들과 달리 차가 다닐 수 있게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다. 그래도 오름을 오르는데 차를 타고 오를 수 없는 법. 입구에 차를 세워두고 걸어서 올랐다. 약 20분쯤 걸었더니 갈림길이 나왔는데, 좌측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불탑사와 원당사가, 길을 계속 오르면 문강사가 나온다고 표시되어 있다.
5분 정도 더 오르니 시멘트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넓은 연못을 갖추고 있는 사찰이 나타났다. 사찰 버스에는 '대한불교 천태종 제주지부 문강사'라고 적혀 있었다.
원당봉의 분화구 능선은 북쪽으로 약간 허물어져 있다. 문강사는 오름의 분화구 안에 자리 잡고 있는데,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북쪽을 제외하고는 분화구 능선으로 둘러싸여 있다. 과거 용암이 분출할 때 자연이 만들어 놓은 능선은 절을 둘러싼 토성이 되고, 분화구 내부에 산정호수가 있던 곳엔 연못이 만들어져 있으니, 절이 제대로 자리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당봉의 본격적인 산책로는 문강사 마당에서 시작되었다. 서쪽으로 오르는 산책로를 따라 몇 발자국 걸어 오르니 '원당봉수대터'를 알리는 표지가 보였다. 원당봉은 정상에 서면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기 때문에 이곳이 왜구의 침입을 파악하여 알리기에는 최적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서쪽에 있는 사라봉수대와 동쪽에 있는 서산봉수대가 연기로 교신했다. 지금도 사라봉 정상에는 봉수대가 남아 있는데, 원당봉수대는 흔적도 남아있지 않고 표지만 세워져 있었다.
정상까지 산책로 거리가 멀지도 않은 데다 바닥에 고무를 깔아 놓아서 어려움 없이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오름 정상에 서서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남쪽에 한라산이 선명하게 자태를 드러냈고, 서쪽에는 제주시 도심이 눈앞에 들어왔다. 동북쪽 신촌 해안 마을 들판과 푸른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은 정감 있게 다가왔다.
내려올 때는 서쪽 길을 따라왔다. 정상에서 조금 내려오니 잔디밭 마당에 불상이 세워져 있는 건너편 사찰이 눈에 들어왔다. 이 오름을 원당봉이라 부르게 만든 원당사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절이다.
문강사 마당에 이르니 산책로는 끝나고 다시 시멘트 길이 나왔다. 그 길을 가다 올라올 때 보았던 갈림길에서 불탑사로 향하는 길을 따라갔다. 불탑사 입구에 이르니 그곳에 원당사의 터임을 알리는 표지가 있었다.
'원(元)제국 시대 제주도 3대 사찰의 하나였던 원당사(元堂寺) 터. 13세기 말엽에 원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보이며 원나라 기황후가 삼첩칠봉(三疊七峯)의 명당자리에 절을 지어 불공을 드리기 위해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원당사는 법화사(서귀포시 하원동 소재), 수정사(제주시 외도동 소재)와 더불어 고려시대 탐라에 지어진 3대 사찰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원제국의 마지막 황후인 기황후(奇皇后)가 아들을 얻기 위해서 세운 절로 알려졌는데, 법화사나 수정사화는 달리 창건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구전에 의해서만 창건과정을 짐작할 따름이다.
고려로 쳐들어온 원나라 조정은 1231년 이래로 100여 년 간 고려조정에게 끊임없이 공녀를 요구했다. 딸을 가진 부모는 한시도 노심초사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딸을 공녀로 보내지 않기 위해 부모들은 딸을 승려로 만들기도 했고, 어린 나이에 시집을 보내기도 했다.
고려시대 선비였던 이곡(목은 이색의 아버지)이 쓴 '공녀반대 상소문'을 보면 공녀제도에 대한 국민들의 두려움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 (공녀로 뽑히면) 비통하고 원통하여 울부짖다가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사람도 있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근심 걱정으로 기절하는 사람도 있고, 피눈물을 흘리며 눈이 멀어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기황후는 원래 고려 미천한 가문의 여인이었는데, 1333년 14세의 나이로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갔다. 원나라로 끌려간 뒤는 그녀가 처음 맡은 일은 황제인 순제에게 차를 올리는 일이었다. 기(奇)씨 소녀가 순제의 다과를 돌보게 된 이면에는 고려 출신 내시 고용보의 판단이 숨어 있었다.
원사(元史) 후비열전에는 "순제를 모시면서 비(妃:기황후를 말함)의 천성이 총명해 갈수록 총애를 받았다"고 기록되어있는데, 그 총명함을 맨 처음 눈치 챈 사람이 고용보였던 것이다.
결국 기씨는 순제의 총애를 받아 제1황후로부터 채찍으로 맞는 핍박을 견디고 난 뒤 마침내 제2황후가 되는 데 성공했다. 인생에 찾아온 가장 비극적인 상황을 극복해서 대제국을 좌지우지하는 지위에 오른 것이다.
학자들은 고려에서 온 공녀가 당대 최고 권력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으로 다음 몇 가지를 꼽는다.
우선 그녀는 빼어난 미모와 출중한 처세술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기씨의 처세는 순제뿐만 아리라 백성들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결국 순제로 하여금 제1황후였던 타나시리에게 사약을 내리게 했다.
그리고 원 순제가 어린 시절 고려 땅에서 겪었던 아련한 추억도 그녀가 권력을 잡는 데 크게 작용했다. 순제는 어린 시절 권력다툼에 밀려 11세의 나이로 고려에 유배되어 인천 앞바다에 있는 대청도에서 외로운 시절을 보낸 경험이 있었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1339년에 아들(아이시리다라)을 낳아 후사가 없던 순제의 대를 잇게 했다는 점이다. 아이시리다라는 1353년 14세의 나이에 황태자로 등극해 그녀의 권력이 더욱 확고해지는 데 기여했다.
제주도에 남아 있는 전설의 내용 대로 기황후가 원당사를 통해 아들을 얻었다면, 원당사는 당시 세계를 지배했던 대제국의 권력지형을 바꾼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불탑사 내부에 있는 안내문에 원당사의 창건연대가 1300년(충렬왕 26년) 경이라고 적혀 있는데, 기씨가 공녀로 잡혀갔던 시기가 1333년임을 감안하면 전설과는 맞지 않는 기록임을 알 수 있다.
1339년 기씨가 원제국의 황후에 오른 뒤 원제국이 패망할 때까지 그녀의 권세가 지속되던 30년간 그녀와 고향인 고려국과의 관계는 그리 원만하지 못했다. 당시 고려에서는 그녀의 오빠 기철을 중심으로 한 권문세족의 세도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항상 백성들과 조정의 원성을 받았기 때문이다.
권문세족은 충목왕의 개혁정책을 좌절시켰고, 농장을 만들어 백성을 수탈했으며, 임금 앞에서도 자신을 신하라 칭하지 않는 등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었다. 이들은 결국 반원자주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공민왕에 의해 제거되었다. 이를 병신정변(丙申政變 : 1356년)이라 한다.
이에 분노하여 기황후는 공민왕을 폐하고 충선왕의 셋째 아들이었던 덕흥군을 왕으로 책봉하려 하였다. 덕흥군에게 원나라 군사 1만을 주고 고려를 장악하라고 명하였으나 덕흥군이 이끌던 군대는 최영과 이성계의 군대에게 격파되었다. 친정 오라비들을 위해 복수의 칼을 갈던 기황후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1364년의 일이다.
1368년 주원장이 이끌던 명나라 군대가 베이징을 점령하자 기황후는 몽고 내륙으로 철수했다. 그곳에서 순제가 죽자 비로소 황태자 아이시리다라가 황제로 즉위하였다. 몽고대륙에서 기황후는 황제의 어머니가 되었지만 원제국과 더불어 당대를 호령했던 그녀의 권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효종 4년(1653) 이원진(하멜이 제주에 표류했을 당시 제주목사였다)의 <탐라지>에 원당사가 잠시 소개되고 난 뒤 더 이상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원당사는 17세기 후반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과거 원당사가 있던 자리에 지금은 비구니 사찰인 불탑사가 세워져 있다. 불탑사 입구 반대편에는 태고종 원당사가 자리 잡고 있는데, 이 원당사는 기황후가 세웠다는 원당사가 아니라 최근에 새로 지어진 사찰이다.
불탑사는 1914년 제주 불교를 크게 부흥시킨 안 봉려관 스님이 대중 포교를 위해 지은 사찰이다. 불탑사는 4·3사건 당시 다시 폐허되는 아픔을 겪었으나 1953년에 이경호 스님에 의해 재건되었다.
이곳에서 원당사가 폐사되고 4·3 당시 절이 불타는 우여곡절 속에서도 고려시대 세워진 5층석탑은 역사의 증인으로 그대로 남아있다. 제주 유일의 고려석탑인 '원당사터 5층석탑'은 1971년 제주도 지방문화제로 지정되다가 1993년에 이르러 국가지정문화제로 격상하여 보물 1187호로 지정되었다.
기황후가 절을 세워 아들을 얻었다는 전설 때문에 지금도 아들을 못 낳은 수많은 여인들이 기도를 올리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원당사는 간데없고 아들 낳을 수 있다는 민간신앙만이 이곳을 지키고 있다.
2008.07.08 16:52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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