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적인 비와 안개의 코스
유지성
풋! 스위스 "개뿔~"한참을 오르내렸다. 그런데 같이 참가한 일본 친구 중 두명은 산악 레이스 베테랑들인지라 첫번째 체크포인트 이후로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잠깐 여기서 친구들을 소개하자면, 먼저 '유카꼬'는 사하라 사막 대회 원년 동기로 언제부터인가 나보다 기량이 한참을 앞서가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사막에 가면 잘 먹는 게 최고라며 45리터짜리 커다란 배낭에 거의 80%를 먹거리로 채우고 "다베테, 다베테(먹자)"를 외치는 가냘픈 여성이다.
초콜릿만 있으면 밥은 처다보지도 않는 초콜릿 중독자답게 배낭에는 물과 각양각색의 초콜릿이 가득 넘쳐난다. 초콜릿을 먹는 폼도 특이해서 영화 <데스노트>의 주인공 'L'과 비슷하게 이상한 자세로 쪼그리고 앉아서 먹는다. 그런데 그 모양이 묘하게도 초콜릿이 굉장히 맛있어 보이는 시각적인 효과를 연출한다. 괜시리 초콜릿을 따라서 먹게 되는 바이러스를 전염시키는 특이한 언니다.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동화 작가로 활동 중이다.
'미호'상은 좀 무섭다. 소싯적 배트민턴 선수 출신 답게 기초 체력이 아주 튼튼하다. 일반 마라톤은 잘 안 나가고 산에서 주로 달리는데 달릴 때 보면 힘들어 하는 모습이 전혀 없다. 엘리트 선수 출신들은 세월이 가도 기본 가락은 한다는 느낌이다. 일본의 마라톤 잡지인 <러너즈>에서 일을 한다. 그리고 와인을 전문적으로 배운 와인 전문가다. 와인을 마실 때면 항상 뭔가 열심히 설명을 해주고 교육을 시키지만 우리들은 돌아서면 바로 잊어 버리고 만다.
'미에'는 조그마한 키에 옆으로 쭉 찢어진 '네꼬노메(고양이눈)'을 가진 귀여운 언니다. 글을 쓰는 작가인데 거래하는 출판, 잡지사가 한둘이 아니다. 작업하는 잡지들을 보면 전문가의 손을 거친 글들의 수준은 다르다는 걸 한눈에 알수 있다. 그에 비하면 나의 글빨은 완전 애송이 수준이다. 그나마 3명 중에서는 나하고 달리는 수준이 비슷해 동반주를 자주 하게 된다. 2006년 아타카마사막 레이스에서 중도 탈락했지만 올해 멋들어지게 복수전을 펼쳤다.
해발 2100m첫번째 체크포인트에서 유카꼬를 만났다.
"유상, 좃또마떼. 다베마쇼.(잠깐 먹고가자)"유카꼬가 반갑다며 한 무더기의 먹을거리를 꺼내든다. 아니, 이 여자는 인생을 먹는 데 목숨 걸었나. 그리고 도대체 그 작은 배낭에 얼마나 많은 음식이 있는 건지 궁금하다.
첫번째 체크포인트에서 반가운 소식을 전해준다. 악천후로 인해 40km 코스가 26km로 줄었단다. 그래 잘 됐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너무 힘들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갈수 있냐는 한탄이 환호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계속되는 폭우 속에 우려했던 '구르기쇼'가 시작이 됐다. 예전 베트남 대회 같이 두꺼운 진흙 때문에 미끄럽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온통 길이 '물바다'라는 것.
이곳은 화산의 영향인지 흙 색깔이 약간 검은색을 띤다. 코스에 수시로 나타나는 웅덩이의 색깔도 시커먼 늪지대 같다. 아주 더러운 기분을 가지고 웅덩이를 건너자면 물 밑에서 나무 뿌리들이 발을 걸어 넘어뜨린다. 코스 중간부터는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세찬 비가 시야를 가렸다. 가만히 있으면 춥고, 비를 피할 만한 곳도 없고, 살기 위해서 뛰다 걷다를 반복한다.
원래 2000m를 넘나드는 코스의 능선을 타고 달리는 맛은 스위스의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커버터블 자동차를 타고 달리는 느낌 그대로다. 하지만 벼락치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수도 없이 많은 우박 같이 커다란 빗방울을 맞고 달리다 보면, "풋! 스위스는 개뿔", 이렇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