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그림두 권으로 나온 <제로>
애니북스
(1) 사랑 없이 사람을 만나는 우리들 오늘날
.. "그보다 아저씨, 저 눈 좀 봐. 시합이 다가오면 늘 저래. 살이 빠져서 그런가? 이젠 익숙하지만. 기분 나쁜데. 살인자의 눈. 다른 시대에 태어났으면 사람 꽤나 죽였을 거야, 저 양반." .. (1권 127쪽)만화책 <ZERO>에 나오는 '고시마'는 권투선수입니다. 경기를 한 번 치러서 이기면 영웅으로 대접을 받고 어마어마하게 돈방석에 앉는 '프로' 권투선수입니다.
권투선수 '고시마'는 뒤에서 밀고 있는 부자가 있습니다. 부자는 고시마와 붙는 경기를 한 번 꾀할 때마다 고시마한테 퍽 많은 돈을 내어주지만, 부자가 손에 쥐는 돈은 훨씬 많습니다. 고시마와 붙는 선수한테도 많은 돈을 내어줄 테지만, 이렇게 쓰는 돈은 자기(부자)가 벌어들일 돈하고 견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 "이 세계에선 제로니 뭐니 불리며 우상처럼 숭배 받지만, 링을 내려가면 어떨 것 같아? 너한테 뭐가 남냐? 아무것도 없지. 사람이 그래서야 되겠냐?" "관 둬. 아라키. 내가 당신에게 배운 거라면 사람 때려눕히는 것뿐이야. 난 그걸 충실히 지켜 왔다고 생각하는데." .. (1권 206∼207쪽)권투선수가 다른 세상에 태어났다면, 그러니까 옛날에 태어났다면 무슨 일을 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군대를 이끄는 군간부가 될 수 있었을까요. 그러나 군간부가 되자면, '씨가 좋은 어버이'한테서 태어나야 합니다. 낮은자리 사람 집안에서 태어나 보았자, 부역이니 전쟁이니 끌려가서 칼받이(요즘은 총받이지만, 옛날에는 칼받이였지 않으랴 싶습니다)로 스러지지 않았을는지요. 힘 잘 쓰는 놈이니 '양반집에서 막 부려먹는 돌쇠'가 되지 않았을는지요.
스스로 무엇인가 뜻을 품었다면, 산속으로 들어가 화적패가 되었을까요. 아니면, 거의 모든 여느 사람들 삶이 그러했듯이, 농사꾼이 되어 부지런히 땅 갈고 밭 일구면서 흙과 함께 살아가며 식구들과 오순도순 살아갔을까요.
오늘날은 싸움 잘하는 일도 '짭짤한 돈벌이'가 됩니다만, 이를테면 적어도 깡패가 되어 동네에서 돈 뺏는 짓이나마 할 수 있고(하긴, 옛날에도 깡패는 있었겠지요), '운동경기가 된 격투기' 선수로 뛸 수 있습니다. 요사이 권투는 시들해지고 킥복싱과 케이원과 프라이드와 유에프시처럼 피 튀기고 관절 꺾으며 쓰러진 선수를 마구 밟거나 까부수어도 되는 '격투기'가 하나둘 늘어나고 있으니, 처음부터 아예 격투기 선수가 되고자 싸움박질을 배우려고 땀흘리는 사람도 생겨납니다.
'하늘이 내려준 단단하고 무시무시한' 주먹이 있는 사람이라면, 오늘날에는 그렇게까지 기를 쓰고 돈을 쓰고 시간을 쓰고 하지 않더라도 '맞선이를 반죽음으로 몰아넣도록 두들겨패는' 운동경기를 뛰면서 더 많은 돈과 더 높은 이름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왜 자기 수명을 깎아먹으려 들지? 상대만 잘 고르면 앞으로 5년은 지킬 수 있는 타이틀인데!" "그렇게 지킨 챔피언 벨트, 죽을 때 배에 두르고 관에 들어갈까? 하하하." .. (1권 158쪽)그런데, 돈으로 움직이는 세상, 돈이 으뜸이 되는 세상에서는 무엇이든지 '내기'를 하고 '겨루기'를 해야 합니다. 한 배에서 나고 자란 형제 사이에서도 누가 젖을 더 많이 빨아먹느냐를 겨루어서 이겨야 좀더 잘 살 수 있습니다. 마음을 탁 열어 놓고 스스럼없이 사귈 동무는 없어도 되는 가운데, 혼자서 우뚝 선 다음 자기 뒤치닥꺼리를 맡아 줄 아랫사람을 부리면 되는 세상으로 빠르게 바뀝니다.
아이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따르면서 '더 잘 싸워서 더 옆사람을 밟고 올라서는 인간병기'로 거듭납니다. 어버이는 또래 이웃을 살피면서 당신들 아이가 얼마나 '이웃 또래를 잘 죽이거나 무찌르면서 더 높이 올라설 수 있는가'를 따지며 북돋우고 채근하고 기름을 칩니다.
"돈도 있는" 세상이 아니라 "돈만 보는" 세상이 깊어가는 이 땅에서는, 이제 교과서와 책과 종교지도자 말씀에서도 '부자와 가난한 이 푸대접'을 다루지 않습니다. 또 '농사꾼과 노동자가 되도록 이끌지 않는' 이 나라로서는, 살결빛이 다르고 몸차림과 얼굴이 다르며 몸 어느 한 군데가 아프거나 절뚝거리는 사람들은 손쉽게 따돌릴 뿐더러 괴롭혀서 아예 일어설 수 없도록 밟아 버리고 있는 이 겨레한테는 눈에 아무것도 뵈지 않습니다.
눈이고 마음이고 머리고 몸이고 돈만 들어차 있으니 사랑이 깃들 수 없어요. 입이고 어깨고 팔다리고 돈으로만 채워져 있으니 믿음이 스며들 수 없어요. 귀고 가슴이고 손발이고 돈으로만 발라 놓고 있으니 나눔이 자리할 수 없어요.
.. "토라비스는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고, 그래야 해요." "네?" "서두르지 않으면 고시마씨에게 잡아먹힐 걸요." .. (2권 55쪽)언뜻 보기에는 앞을 내다보고 가는 길 같지만, 조금도 앞을 내다보는 길이 아닌 삶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위를 올려다보며 가는 길 같지만, 하나도 위를 올려다보는 길이 아닙니다. 문득 보기에는 크고 높고 많은 무엇인가를 붙잡는 길 같지만, 어느 하나 크거나 높거나 많은 무엇인가하고는 멀어져만 갈 뿐입니다.
이가 아프고 다리가 저리고 재채기가 나오면 '몸이 아프다'고 하면서 병원에 갈 줄은 압니다. 그렇지만 생각이 더러워지고 가슴이 텅 비며 얼과 넋이 비뚤어지고 있음에도 '마음이 아픈' 줄 깨닫지 못할 뿐더러, '마음앓이'를 어느 곳 누구한테서 고치거나 다스릴 수 있는가는 조금도 모르는 한편, 고칠 생각을 않습니다.
텔레비전을 켜면 그만이고, 인터넷을 열면 넉넉하고, 자가용 시동을 넣으면 끝이며, 카드를 긁으면 걱정이 사라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