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쪽에서 본 고구마 밭 노인은 고구마를 좋아하는 손자들을 생각하며 이 밭을 수 천번 오르내렸다고 했다.
홍광석
그래도 이따금 찾아와 용돈이라도 주고 가는 자식을 둔 노인이나 작지만 자기 소유의 땅을 가진 노인들은 아픈 몸을 끌고 농사를 지어도 활기가 있다. 그렇다고 그런 노인들이 일반적인 도시 중산층 정도로 넉넉한 것은 아니다. 밥이며 푸성귀는 그런대로 먹는다지만 혼자 사는 노인 처지이기 때문에 비료와 농약은 외상도 안 통하고 전기, 전화요금은 몇 달 밀리면 끊기는 판이니 떼먹을 수도 없다. 또 당장 빨래하려면 비누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돈까지 자식들이 주는 돈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형편이 어려운 노인들의 사정을 주로 듣고 상대하는 쪽은 아내다. 나는 그 옆에서 대강 듣는 편이다. 그래서 마을 노인들의 사정은 아내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지난 7월 28일, 고흥댁이라는 택호로 불리는 송노인이 아내를 부르더니 간밤에 자기가 심은 고구마밭이 멧돼지에게 당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미 당한 몇 집의 이야기를 곁들이고 우리 고구마밭 걱정도 하는 것이었다.
논 다섯 마지기 농사지어 자식들 조금 주고 먹을 것 남겨놓고 수매했더니 손에 떨어진 금액이 고작 90만원이더라고 했던 노인이었다. 남이 놀리는 비탈진 산밭을 빌려 고구마를 심어 손자들에게 주려고 했는데 종자를 받기도 어렵게 되었다며 걱정하는 노인을 따라 갔더니 이른 봄부터 가꾼 노인의 정성이 무참하게 짓이겨져 있었다.
피해액이 20만원 이하라서 보상받을 수 없다?멧돼지의 개체가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환경 측면에서는 긍정적일 수 있다. 가정의 난방 이 화석 연료로 대체되면서 우리나라 산은 많이 푸르러졌는데 여름철이면 낙엽 관목이나 칡덩굴가지 우거져 다니던 길도 찾기 어렵다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산에 온갖 짐승들이 많이 살고, 새들이 노래한다면 오죽 좋은 일인가!
그러나 짐승들의 증가를 반길 수 없는 측면도 있으니 산짐승들의 출몰로 인한 애잔한 농민들이 입는 피해가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농부병으로 허리가 자유롭지 못한 노인의 표정이 어둡기만 했다. 밭이랑에 풀 한포기 없이 맸던 정성, 가을이면 도시 자식과 손자들에게 나누어주면서 할머니의 존재를 인정받으려고 했던 희망, 그래도 남는 것은 장에 내어 쌈짓돈을 마련하면서 보람을 느끼려고 했건만 그런 꿈들이 하루저녁에 스러져 버린 일흔 두 살 할머니의 아픔을 누가 어떻게 보상할 수 있을 것인가. 농민들의 피해를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으로 계산 할 수 없다는 문제임을 느낄 수 있었다. 이장을 통해 읍사무소에 신고하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어제(31일) 송노인을 만났더니 이장의 신고로 읍사무소에서담당 공무원이 어제(30일) 다녀갔지만 피해면적이 330㎡, 피해액이 20만원 이상이라야 보상도 받을 수 있다는데, 우선 피해면적이 미달이고, 피해액도 농수산부가 정한 기준에 미달되기 때문에 보상은 받을 수 없다고 했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공무원의 적법한 행위를 탓할 수는 없다. 아마 현장 실사를 나온 공무원도 농촌의 사정, 농민의 심정을 몰랐을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금을 잃은 것보다 더 허탈해 하는 노인의 딱한 형편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 같아 마음 한쪽의 서운함을 버릴 수 없었다. 피해면적이 330㎡, 피해액이 20만원 이상 되어야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법과 제도는 가난한 농민들은 아예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른 봄 고구마를 묻어 순을 기르고 다시 그 순을 땅에 옮겨 심고 일삼아 이랑의 풀을 뽑은 노고에 비하면 농민이 차지하는 소득은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다. 지난해 장에서 봤던 기억으로는 고구마 10kg 한 박스 소비자 가격이 1만원쯤 되었을 것이다. 옥수수는 한 개에 불과 300원을 넘지 않는 것으로 기억한다.
모든 공산품에는 소비자 권장 가격이 박혀 있다. 공산품의 가격은 생산자가 결정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농민들은 자신들의 생산물에 가격을 결정하지 못한다. 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맡겨버린 농산물 가격정책 때문에 농민들은 봄부터 가을까지 기나긴 시간 풍수해 등 자연재해는 물론 온갖 병충해와 풀과 싸워가며 가꾼 땀과 정성의 가치를 자신이 주장할 수 없다.
아이들이 먹는 과자도 최소한 1000원 한 장이 없으면 구경하기도 어려우나, 밥 한 공기의 쌀 가격이 불과 200원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농민들은 그런 현실에 절망하고 농촌을 떠났을 것이다.
허리 굽은 노인들의 아픔은 누가 달래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