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청풍. 서울 청운동 김상용의 집터에 남아있는 백세청풍 글씨. 원래 대명일월백세청풍 이었으나 일제강점기 주택을 지으며 대명일월은 훼손되고 백세청풍만 남아있다. 대명일월(大明日月)은 그냥 크고 밝은 해와 달이 아니라 명나라 세월로 반드시 되찾아야 할 그 날이다. 백세(百世)는 3천년이 되나 이는 구체적 숫자가 아니라 오랜 세월 또는 영원을 뜻한다. 청풍의 청(淸)은 매섭도록 맑고 높다는 뜻이고, 풍(風)은 바람이 아니라 군자의 덕과 절개를 뜻한다. 따라서 대명일월 백세청풍은 세세년년 명나라에 절개를 지키자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존주양이(尊周攘夷) 사상은 조선후기사회를 지배했다.
이정근
대륙 패권전에 자신감을 얻은 청나라, "조선의 반청세력을 척결하라"외곽을 때리는 탐색전은 끝났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야 한다. 물론 청나라로선 '명과 교호를 끊는다'는 강화조약을 어긴 조선이 괘씸했고 명나라와 밀통한 조선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하지만 조선군을 징발하여 실전에 투입해본 결과 조선군의 전투력은 오합지졸에 불과했고 명나라와의 대륙 패권전쟁에 자신감을 얻은 청나라는 명이 멸망하면 내통문제는 자연스럽게 소멸되리라 생각했다.
핵심은 조선 내부에 잠복해 있는 반청세력이었다. 이를 척결하지 않는 한 조선을 마음대로 요리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부릅뜬 눈으로 홍서봉을 노려보던 용골대가 태풍의 핵으로 진입했다.
"김사양이란 자가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관작도 받지 않는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 사람이 있는가?""우리나라에는 김사양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는 없고 전 판서 김시양이 있었는데 안질로 눈 뜬 장님이 되어 을해년 부터 벼슬에서 떠났습니다."'조선은 명나라의 연호를 버리고 청나라의 연호를 따른다'는 조건은 삼전도 강화조약 2번째 항목에 들어있다. 하지만 조선은 이에 따르지 않았다. 재조지은(再造之恩). 명나라에 대한 배은망덕이라는 것이다. 어찌 동방예의지국 조선이 '아버지의 나라를 버리고 오랑캐 나라를 따르냐'는 것이다.
이에 청나라의 추궁을 두려워한 인조는 일부 신료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조정 내부 문서에 청나라의 연호를 쓰도록 명하여 부분적으로 실시되었으나 저항이 만만치않아 백성들까지는 역부족이었다. 기록의 보고라는 <조선실록>에도 숭정제 사망시점인 1644년까지 숭정이라는 연호로 기록되어 있고 그 이후부터 순치로 쓰여 있다.
"그 사람은 왕과 같이 산성에 들어갔다가 어가를 따라오지 않고 그대로 시골로 내려갔다. 관작을 제수해도 받지 않고 세자가 왕래하던 때 모든 사대부는 전송과 영접을 하는데도 유독 참여하지 않았다. 또한 연소배를 시켜 거듭 상소를 올린 자인데 과연 그런 사람이 없는가?"홍서봉은 조정 내부사정을 꿰뚫어 보고 있는 청나라의 정보력에 전율했다.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있는 저들의 첩보는 어디에서 나올까? 결국 조정 내부에서 흘러들어간다는 결론에 도달하자 등골이 오싹했다.
협박에 무너지는 영상, 실명을 실토하다홍서봉은 용골대의 질문 요지를 파악했다. 더불어 용골대가 거론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홍서봉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함부로 확인해줄 수 없다. 자신의 입으로 인하여 어떠한 파란이 밀려올지 예측불허다. 홍서봉이 머뭇거렸다.
"홍정승은 왜 이렇게 꾸물거리는가?"용골대가 호통을 쳤다. 이 소리에 움츠려 있던 홍서봉이 경기를 일으킬 뻔했다. 먹이를 노리는 살쾡이처럼 홍서봉을 노려보던 용골대의 시선이 알사에게 옮겨갔다. 금방이라도 "묶어라"는 명이 떨어질 것만 같은 공포분위기다. 용골대와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있던 홍서봉의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김시양은 병으로 산성에 들어가지 못했던 사람이고 김상헌은 산성에 들어갔지만 병으로 어가를 따라 내려오지 못하였는데 그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닌지요?"김상헌이라는 말을 토해내는 홍서봉의 목소리가 개미소리만큼 잦아들었다. 바로 이것이다. 김시양을 들먹이며 변죽을 울리던 용골대가 핵심을 찌른 것이다. 심리전에서 밀린 홍서봉이 김상헌이라는 이름을 실토하고 만 것이다. 잔뜩 주눅이 들어있던 홍서봉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지금 어디 있는가?"용골대의 입가에 득의의 웃음이 그려졌다.
"나이가 많고 병들어 안동에 물러가 있습니다.""경상도가 어느 도인가?"경상도가 어느 도?... 이게 무슨 말씀?분명한 조선말에 홍서봉이 어리둥절했다. 대어를 낚은 용골대가 흥분하여 속도위반을 했다. 냉정보다 감정이 앞서간 것이다. 이것은 통역상의 오류가 아니다. 만주족 용골대의 입에서 분명 경상도라는 조선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용골대가 심양을 떠나기 전, 이미 그들은 첩보에 의해 김상헌이 경상도 안동에 내려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의주에 온 것이다. 용골대의 실수 같지만 은연중에 나타난 그들의 본색이다.
"아닙니다. 안동입니다.""그래, 안동이 어느 도인가?""경상도입니다.""즉시 조정에 보고해서 그자를 속히 이리로 오게 하라."용골대의 명이 떨어졌다. 용골대가 조선에 나온 목적이 바로 이것이다. 데려오라 했지만 압송하라는 명이나 다름없다. 재야에 묻혀있는 척화파의 거두 김상헌에게 위기가 닥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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