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8.08.18 10:56수정 2008.08.18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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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이틀 앞두고 마지막 장을 보러 부산 구포시장에 다녀왔습니다. 이사를 해서 장을 보려고 했는데, 7년 가까운 세월 동안 주고받은 정 때문인지 밑반찬은 살던 곳에서 사가지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시장에 가려고 집에서 나와 4동 건물 앞을 지나가는데 몰지각한 사람들이 이사하면서 버린 음식물 쓰레기 썩는 냄새가 진동합니다. 지난 4월에도 '양심을 버리고 떠난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기사를 올린 적이 있는데요. 요즘은 그때보다 말도 못하게 더한 것 같습니다.
길가에 불법투기한 생활쓰레기들도 보이는데요. 슬픈 운명을 타고 났으면서도 아름다운 소리로 우리 귀를 기쁘게 해주는 매미들이 무척 고맙고, 못된 인간들에게도 맑은 공기를 제공하려고 탄소동화작용을 열심히 하는 아름드리 은행나무들은 숭고하게까지 느껴집니다.
아파트 정문에서 구포 시장 입구까지는 양반걸음은 20분, 도깨비 걸음으로는 15분 정도 걸립니다.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끼고 걸으며, 김해비행장에 이착륙하는 비행기들의 저공비행을 구경하다 보면 구포시장에 이릅니다.
상추장수 할머니부터 정육점까지
구포시장에 도착하면 정문 광장 한쪽에서 상추와 오이, 부추 등을 파는 상추장수 할머니를 먼저 만나고, 뻥튀기 집이 있는 싸전 골목을 돌아 국수와 반찬 등을 사놓고 시장구경을 합니다. 그러다 출출하면 김밥도 사먹고 계단으로 올라가면 정육점인데 정육점 주인과 커피 한 잔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아파트로 돌아오는 게 평소 장보기 코스입니다. 정육점에 먼저 들러 반대로 볼 때도 있지요.
이번에도 상추장수 할머니를 먼저 찾았습니다. 무더운 여름에는 상추 맛이 별로이지만 약으로 알고 사먹었는데요. 한 달 전쯤에는 상추 값이 올라도 너무 올랐다며 미안해 하더라고요. 할머니는 이사를 하기 때문에 못 뵐 것 같다고 하니까 서운해 하며 부탁을 하는데 아무런 답변도 못했습니다.
"아제가 이번에 서울 올라가믄 청아대에도 좀 올리라. 그라고 우리들 싹 잡아가라 카이소. 그라믄 또 만날 것 아이가···."
청와대에 글이 올라가 노점상 하는 사람들이 모두 서울로 잡혀가면 만날 것으로 아는 상추장수 할머니는 제가 대단한 기자처럼 보였던 모양입니다. 이사 가는 곳이 서울이 아니고 청와대에 글을 올리는 기자도 아니라고 하려다 실망하실 것 같아 "예, 예"하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싸전 골목으로 들어가면 줄지어 있는 가게들 앞에 소복하게 쌓인 온갖 잡곡들이 배를 부르게 하는데요. 특히 돈 빼고는 다 튀겨낸다는 뻥튀기 기계 돌아가는 소리는 고향 시장의 정경을 떠올리게 합니다. 어쩌다 "뻥"하는 소리가 들릴 때는 고향동네 건널목 옆에 있던 뻥튀기 집 앞에서 귀를 막고 숨죽이던 코흘리개 시절이 떠올라 미소가 지어지기도 합니다.
지금이야 뻥튀기가 흔하지만, 강냉이 죽과 수제비로 연명하던 60년대까지만 해도 보리쌀에 당원을 넣은 뻥튀기도 부잣집 아이들이나 먹을 수 있었고, 뻥튀기를 얻어먹으려고 부잣집 아이들을 따라다니며 비위를 맞추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싸전 골목에서 나와 반찬가게 골목으로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3대째 내려오는 전통 구포국수 직영점이 있는데, 지난 5월 치자 콩국수를 해먹기 시작하면서 알게 된 가게입니다. 치자국수 2천 원짜리 하나면 3~4일은 먹기 때문에 4~5일에 한 번 정도 들르지요. 가게 문을 들어서는데 못 보던 젊은 분이 깍듯이 대하며 인사를 하더라고요.
주방에서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치자국수 하나를 사서 나오는데 친절하게 인사했던 젊은 분이 따라나오며 "혹시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에 우리 가게를 소개하신 기자님 아니신가요?"라며 묻더군요. 깜짝 놀라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더니 <오마이뉴스>에 자주 들어오는데 눈팅만 한다며 겸연쩍어하며 웃더라고요.
젊은 분이 선물이라며 2천 원짜리 치자 국수 하나를 주기에 고맙게 받아 들고 반찬가게로 향했습니다.
작년부터 단골로 다니기 시작한 반찬가게는 어머니와 딸이 함께 운영하는데 항상 바쁩니다. 멸치볶음이나 콩자반, 쌈장 맛도 좋지만, 젓갈 국물을 넣고 버무린 싱싱한 겉절이가 마음에 들어 단골이 되었는데요. 장사가 잘되기 때문에 기다렸다, 금방 버무린 겉절이를 사먹을 때도 자주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반찬을 만들고 딸은 판매를 담당하고 있는데요. 어머니는 마음씨 좋은 동네 아주머니처럼 푸짐하게 생겼고, 딸은 탤런트 뺨치는 미인이라서 인기가 좋습니다. 제가 이사를 하게 되어 마지막 장보기가 될 것 같다고 하자 겉절이를 듬뿍 퍼주면서 그동안 고마웠다며 어디를 가시든 건강하시라는 인사를 빼놓지 않더라고요.
<오마이뉴스>에도 올리고, 추억이 될 것 같아 사진을 찍어 보관하고 싶다고 하자, 보관하는 것이야 상관없겠지만, 얼굴이 공개되는 것은 싫다고 하더라고요. 해서 등만 나오면 되느냐고 물었더니 좋다며 웃는 모습이 무척 순진해 보였습니다. 시장에서 억척스럽게 장사를 하면서도 여성의 본능이라 할 수 있는 수줍음을 간직하고 있어 더욱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반찬가게를 뒤로하고 두부와 콩국물을 전문으로 만들어 파는 가게로 갔습니다. 서른여섯 살 때인 5년 전부터 부인과 함께 가게를 운영해 오고 있다는 정 사장은 손님들에게 믿음을 잃지 않는 게 가장 큰 재산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콩은 '밭에서 나는 쇠고기'이니 수입 콩은 수입 쇠고기이고 국내산은 한우라고 하니까 껄껄 웃더라고요.
정 사장은 특히 수입 콩이 판치는 요즘에는 더욱 신용을 지켜야 한다며, 지방간 예방, 동맥경화, 고혈압, 당뇨 및 뇌졸중 예방, 항암작용, 골다공증 예방, 변비 예방에 장 기능 활성화까지 도와주는 만병통치라며 콩에 대한 자랑이 대단합니다.
말이 없는데다 친절하지도 않은 정 사장이 처음에는 조금 거만하게 보이기도 했는데요. 만나는 횟수가 늘어나고 대화가 많아지다 보니 이해를 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사람은 자주 만나야 한다고 하는 모양입니다.
콩국물 가게에서 계단을 오르면 고향 사람이 운영하는 정육점이 있는데 시간이 없어 들르지 못했습니다. 남원이 고향이라는 주인 아주머니는 갈 때마다 커피를 뽑아주십니다. 1주일 전에 들렀을 때는 점심을 함께 하자고 해서 먹었다고 하니까 남편이 먹는 홍삼 진액을 내놓기도 했는데, 들르지 못해 무척 아쉽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꼭 들러서 동서와 먹을 삼겹살도 사고 정겨운 얘기도 나누고 싶습니다.
민중의 숨결이 묻어나는 재래시장은 여름에는 무덥고 겨울에는 춥지만,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인정을 느낄 수 있어 좋습니다. 경상도 사투리가 귀를 따갑게 하는 구포시장도 마찬가지인데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고향에서 느끼지 못했던 정도 맛보았고 많은 것을 배우고 가는 것 같습니다. 구포 시장이여 안녕! 기회가 있으면 또 들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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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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