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제개편안 발표 하루를 앞두고 한나라당이 "대기업에 한해 법인세율 인하 시기를 1년 늦추자"는 제안을 하고 정부가 이를 받아들였다. 대기업 법인세 감세 일정을 1년 늦출 경우 약 1조8천억원의 세수감소분이 확보되는데, 이를 저소득 서민의 민생안정과 영세자영업자의 지원, 일자리 창출 등에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정말로 오랜만에 한나라당 내에서 옳은 소리를 듣는 것 같다. 그런데 뭔가 찝찝하다. 1년 동안 1조 8천억원을 쓰면 민생안정과 일자리 창출이 어느 정도 해결될까? 만약, 1년 후에도 이러한 과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또다시 감세 일정을 연장하거나 전면 재검토할 의향이 있음을 천명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이는 정치권의 전형적인 체면치레에 불과하다.
정권 바뀌니까 조세 연구 결과도 뒤집히네
정부의 법인세 감세의 논리적 근거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법인세율 인하로 기업의 투자가 활성화되어 경제성장률을 제고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나라의 법인세 부담 수준이 국제적으로 비교하여 높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지 하나씩 살펴보자.
기획재정부는 조세연구원의 연구자료(2008. 6)를 인용하며 법인세율을 5%P 인하시 0.6%P의 경제성장률 제고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불과 2~3년 전에는 조세연구원에서 반대의 결론을 내린 연구결과가 나왔고 당시 재경부가 이를 인용하여 우리나라 상황에서 감세정책이 적절치 않음을 지적한 바 있다.
'감세정책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실증적으로 입증한 연구는 찾아보기 어려우며, 영향이 있는 경우에도 그 크기는 매우 작은 것으로 분석(조세연구원, 2004. 12)'('감세논쟁 주요논점 정리' 3P. 재경부. 2005. 11)
'법인세율 인하가 단기간에 기업투자의 증가를 유발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분석됨(조세연구원. 2004. 2)' ('감세논쟁 주요논점 정리' 13P. 재경부. 2005. 11)
도대체 같은 연구원에서 2~3년 만에 이렇게 정반대의 결론이 나올 수 있는가?
모형을 이용한 계량분석은 수치를 동원하기 때문에 매우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가정과 각종 변수의 선택 및 가중치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연구자의 의도가 결론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정권이 바뀐 직후에 나온 연구보고서가 그 이전에 나온 연구보고서와 정반대의 결론이 나온 이유를 짐작케하는 지적이 아닌가 싶다. 특히, 조세연구원이 정부출연 연구기관인 점을 고려하면 '연구자의 의도'에 더욱 더 의심이 간다.
의심을 버리려면 국제기구에서 인정한 외국의 연구사례를 참조하거나 연구기관의 성격(또는 성향)과는 다른 결론이 도출된 연구사례를 참조하는 것이 더 객관적일 듯 싶다. 육식을 싫어하는 사람이 '그 고깃집 맛있다'고 평가할 경우 거의 틀림없이 맞는 이치와 같다.
대학까지 무상교육 포기하고선 겨우 0.09% 성장
1997년 OECD는 'QUESTII 모형'을 이용, 법인세의 변화가 GDP 성장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논문을 소개하였다(Economic Department Working Papers No. 176). 이 연구논문에 의하면, GDP의 1%에 해당하는 만큼 법인세 부담을 매년 줄이고 같은 금액만큼 재정지출을 줄여 재정균형을 유지하는 경우 60년 후의 GDP를 2.02%에서 5.28%까지 성장시키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를 연평균으로 환산하면 0.033%~0.088%의 GDP 성장률이 된다.
이를 우리나라에 적용하면 GDP의 1%인 9조원의 법인세를 경감하고(이는 정부의 법인세 감세안인 5%P 인하의 결과보다 더 많은 금액이다), 그만큼 재정지출을 줄일 경우 연간 최대 0.09%의 경제성장 효과가 있음을 뜻한다. 조세연구원의 연구결과와 매우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연간 9조원이면 모든 학생이 돈 걱정없이 대학교까지 마칠 수 있는 무상교육(고등학교까지 전액 면제+대학교 등록금후불제 도입)이 가능한 예산이다. 0.1%도 안 되는 경제성장률 때문에 이러한 막대한 예산을 희생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가?
한편, 전경련 부설 한국경제연구원에서 2002년 CGE모형을 이용하여 법인세율 인하가 투자 및 경제성장에 미치는 효과에 대하여 실증분석을 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의하면 법인세수를 20% 감소시키고 가계에 대한 보조금 삭감으로 세수 감소를 보전하면 장기적으로 연 0.066%P 경제성장률 상승효과가 있다고 한다('법인세제 개편방향 연구' 한국경제연구원. 2002). 즉, 약 6조원의 법인세를 경감하고 동액 만큼 복지지출을 줄여 재정균형을 맞춘다면 0.066%P의 경제성장 효과가 있다는 것으로서 OECD에서 소개한 위의 연구결과와 비슷하다.
한편, 중립적으로 평가되는 한 연구논문은 법인세 감세의 효과를 위의 연구결과보다 더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 2003년에 발표된 이 연구논문에 의하면, 법인세 평균세율을 25.7%에서 20%로 하향조정하는 경우 연 0.013%P 경제성장 효과가 있다고 한다('CGE모형을 이용한 법인세의 성장 및 분배효과 분석' 경제분석 제9권2호. 전영준. 2003).
법인세 줄여준다고 기업들이 투자할 것 같은가
감세가 투자로 연결되기 어려움은 역사적으로도 이미 증명되었다. 80년대 미국의 대규모 감세정책인 레이거노믹스를 시행한 결과, 소비는 늘었지만 투자는 거의 늘지 않았다.
소비는 늘었는데 투자가 늘지 않으니 국내에 공급부족 현상이 일어나고, 이를 메우기 위해 수입이 급증하여 심각한 경상적자에 시달렸다. 이 때문에 '쌍둥이적자(재정적자+경상적자)'라는 신조어가 탄생하였고, 그 결과로 80년대 하반기부터 미국경제는 심한 몸살을 앓게 되었다.
기업의 투자는 기본적으로 금리와 기대수익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기업의 세후순익의 크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법인세가 줄어들어 기업의 이익이 증가하면 기업의 투자가 자연스럽게 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단순하고 위험한 발상이다.
지난 6월 18일 현대경제연구원에서 '국내 기업의 7대 투자 부진 원인과 유인과제'라는 리포트를 발표했다.
이 리포트에 의하면, 상장 제조업체의 2007년 말 사내 유보율이 전년대비 64.8%가 증가하였는데도 기업들의 투자가 부진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사내 유보현금이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투자가 늘지 않는다는 것은 기업의 돈이 부족하여 투자를 못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법인세율을 인하하여 기업의 세후이익이 늘어난다고 해도 그만큼 투자는 늘지 않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가 있다.
굳이 경기부양을 하려면 재정지출이 더 효과적이다.
2004년 산업연구원은 재정지출이 경제성장에 미치는 효과에 관한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다. 이 연구결과에 따르면, 정부재정지출을 1조원 증가시킬 경우 연간 경제성장률을 0.12%~0.22%P 높이는 것으로 나타났다('정부지출의 거시경제 및 산업별 파급효과' 산업경제정보 제236호. 2004). 특히, 제조업보다 교육·보건 부문 등 서비스부문의 소득창출효과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감세와 재정지출의 효과에 대한 위의 연구결과만 비교하면, 감세보다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의 재정지출을 하는 것이 경제회복에 더 효과적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사회서비스의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나라에서는 '감세-재정지출 축소' 정책 보다 오히려 교육·보건 등의 사회서비스 분야와 과학기술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성장잠재력을 높이는 데 더 유효하다.
사람에 돈 써라, 그래야 산다
이는 최근에 등장한 경제성장론에도 부합되는 정책방향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경제학에 신성장론이 등장하였다.
고전경제학에서는 노동과 자본의 투입량만이 경제성장의 내생변수로서 인정되었다. 그래서, 길 닦고 큰 공장과 건물을 짓는데 돈을 쏟아붓고 그 과정에서 고용이 창출되면 그것이 곧 성장이었다.
그러나, 신성장론에서는 노동과 자본의 투입량 외에 질적인 차원의 인적자원과 지식스톡이 내생변수로 추가되었으며, 이 부분이 경제성장에 더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지식 역시 사람에 의해 축적되는 것이니 결국 사람에 대한 투자가 경제 성장을 이끄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투자는 교육과 복지에 대한 투자를 의미한다. 따라서, 신성장론에 의하면 복지는 성장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성장의 기반이 된다. 평생학습시스템과 보편적 복지시스템이 잘 갖추어진 북유럽 국가가 높은 조세부담률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국가경쟁력에서 최상위를 차지하는 비밀이 여기에 있다.
핀란드에 본사를 둔 노키아의 예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가 있다. 핀란드의 총 조세부담률은 세계 3~4위 수준이다. 그리고 노키아의 외국인 지분은 거의 90%에 육박하고, 노키아의 전세계 매출액에서 핀란드 국내 매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2~3%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의 상식으로는 노키아가 핀란드에 남아있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
핀란드는 대학원까지 돈 한푼 없이 공부할 수 있는 무상교육과 원하는 시기에 언제든지 공부할 수 있는 평생학습시스템, 그리고 산학연이 연계된 교육 및 연구개발 시스템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시스템이 세계 최고의 기업의 눈높이에 맞는 인재를 배출하기 때문에 노키아가 핀란드에 남아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풍부한 자원이라고는 사람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려면 북유럽의 비밀을 풀어야 한다. 세금 싸고 인건비 싼 것을 무기로 투자를 유치하겠다는 이른바 '덤핑경제' 방식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선진국이 될 수 없다.
법인세 낮추려면 개인소득세 늘려야 할 판에...
한편, 기획재정부는 총 조세수입 중 법인세가 차지하는 비중이 OECD 평균보다 높으며, 법인세율 역시 OECD 평균 24.2%(우리나라는 25%)보다 높다며 법인세율 인하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2006년 기준 우리나라의 총 조세부담률은 26.8%로 OECD 국가 중 멕시코(20.6%) 다음으로 낮은 수준이다. 최저 수준의 총 조세부담률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갖고 법인세에 대한 감세의 정당성을 논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굳이 비교하려면 GDP 대비 법인세수가 차지하는 비중을 비교해야 한다.
또한, 법인세수의 적정성은 개인소득세수와 연동하여 고려해야 한다. 세금은 과세대상에 따라 크게 소득세·소비세·재산세로 나뉘어지고, 소득세는 개인소득세와 법인소득세로 나뉘어 진다.
그런데, 각 나라의 조세구조의 특성에 따라 개인소득세와 법인소득세의 상대적 비중에 차이가 난다. 법인세가 높은 나라에서는 개인소득세가 상대적으로 낮고 법인세가 낮은 나라에서는 개인소득세가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며 전체적인 소득세수에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예를 들면, 스웨덴과 핀란드 등 북유럽 국가의 GDP 대비 법인세수는 우리나라보다 낮지만 GDP 대비 개인소득세수는 4~5배 가량 더 높다. 이 경우, 단지 법인세수 비중만 비교하며 법인세율을 낮추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옳은가?
법인세와 개인소득세를 합한 소득세수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볼 때 우리나라는 7.5%로서 OECD 평균 13%의 60% 수준이다(2005년 기준). 따라서, 굳이 법인세를 줄이겠다면, 개인소득세를 올려 어느 정도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중간 수준의 법인세는 낮추고 낮은 수준의 개인소득세는 더 낮추면' 도대체 나라살림은 어떻게 꾸릴려고 하는지.
'감세하면 경제가 산다'는 이 단순무식한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분석할수록 이번 세제개편안은 합리적인 정책적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맹목적인 신념 또는 잘못된 정치적 판단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처럼 '감세천국, 증세지옥'이 종교적 신념화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국민이 어떻게 생각하든 우군(부유층과 대기업)만 장악하면 정권은 영원할 것'이라는 잘못된 정치적 판단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스럽다.
2008.09.03 09:35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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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인세 9조원 깎아도 겨우 0.09% 성장 교육·복지에 1조 쓰면 0.2% 성장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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