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195)

― ‘몇 십 년 만의’, ‘모처럼만의’, ‘자신들만의’ 다듬기

등록 2008.09.04 10:22수정 2008.09.04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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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몇 십 년 만의 추운 겨울

 

.. 그 전 해 겨울은, 그것은 또 무슨 몇 십 년 만의 추운 겨울이라는데, 미니스커트 그것보다도 짧은 오바코트가 유행했으니 말이다 ..  (리영희) <70년대의 우수>(청람,1980) 199쪽

 

 ‘년(年)’은 ‘해’로 다듬습니다. “그 전(前) 해 겨울”은 “지난 겨울”이라고 하면 됩니다. ‘미니스커트(miniskirt)’는 ‘짧은치마’로 고칩니다. ‘유행(流行)했으니’는 그대로 두어도 괜찮으나, ‘나돌았으니’로 손보아도 됩니다.

 

 ┌ 몇 십 년 만의 추운 겨울

 │

 │→ 몇 십 해 만에 찾아온 추운 겨울

 │→ 몇 십 해 만에 몰아닥친 추위

 └ …

 

 추위나 더위는 찾아오거나 몰아닥칩니다. 토씨 ‘-의’를 붙이며 “얼마 만의 추위”나 “얼마 만의 더위”로 적지 말고, ‘-의’를 덜어서 “얼마 만에 찾아온 추위”나 “얼마 만에 몰아닥친 더위”로 손보아야 알맞아요.

 

 어쩌면 토씨 ‘-의’를 붙이는 말투가 익숙하게 되어서 이렇게 ‘만의’도 아무렇지 않게 쓰는지 모릅니다. 누구나 자기한테 익숙한 말을 쓰기 마련이잖아요. 그래, 어릴 적부터 우리가 어떤 말을 익숙하게 듣고 배우고 쓰는지를 잘 살펴야겠습니다. 어릴 적부터 바르고 깨끗하고 알맞는 말을 듣고 자라야, 어른이 되어도 바르고 깨끗하고 알맞는 말을 쓸 테니까요.

 

 

ㄴ. 모처럼 만의 햇살이다

 

.. 어느새 비가 그쳤다. 모처럼 만의 햇살이다 ..  <현진-삭발하는 날>(호미,2001) 115쪽

 

 국어사전을 보면 “십 년 만의 귀국”이라는 보기글이 있습니다. 이런 보기글은 “십 년 만에 돌아옴”이나 “열 해 만에 돌아옴”으로 다듬어 주면 좋겠어요.

 

 ┌ 모처럼 만의 햇살이다

 │

 │→ 모처럼 보는 햇살이다

 │→ 모처럼 구경하는 햇살이다

 │→ 모처럼 쬐는 햇살이다

 └ …

 

 토씨 ‘-의’를 잘못 쓰면 우리 말 느낌과 맛을 확 죽일 수 있습니다. 이 자리를 보면, 모처럼 햇살을 느꼈다고 하니까, “모처럼 느끼는 햇살이다”라 할 때가 가장 어울립니다. 다음으로, 햇살을 모처럼 본다고 할 수 있으니 “모처럼 보는 햇살이다”라고 할 수 있어요. 보는 일이란 구경하는 일이기도 하니 “모처럼 구경하는 햇살이다”도 됩니다. 햇살은 ‘쬔다’고 하니까 “모처럼 쬐는 햇살이다”를 써도 돼요.

 

 그렇지만 이런 우리 말이 아닌 ‘-의’를 넣으면 어떻게 되나요. 글쓴이가 햇살을 어떻게 부대끼는가 헤아릴 수 없을 테지요. 햇살을 느끼는지 보는지 구경하는지 쬐는지, 또는 햇살을 어떤 모습으로 받아들이는지 알 수 없어요. 살가우면서 또렷한 말느낌이나 말맛이 확 사라지게 하는 토씨 ‘-의’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은 되도록 안 써야, 아니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우리 말이 제자리를 잡으면서 차츰 힘을 얻는 가운데 맛깔스러움도 살아날 수 있다고 느낍니다.

 

 

ㄷ. 자신들만의 고유한 것

 

.. 우리는 인간들이 자신들만의 고유한 것이라고 주장해왔던 질서와 예의를 가지고 모든 행사를 치렀다 ..  <그랑빌/햇살과나무꾼 옮김-그랑빌 우화>(실천문학사,2005) 13쪽

 

 ‘-만’이라는 토씨 뒤에 ‘-의’를 붙여서 “나만의 것”이나 “자신들만의 것”이라고 적으면 다듬기 퍽 어렵습니다. 이런 말은 그냥 이렇게 두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늘 어색해요. 제가 우리 말 운동을 하기 때문에, 또 토씨 ‘-의’를 안 쓰는 편이 좋다고 말하기 때문에 어색하다고 느끼지는 않아요. 어릴 적부터 어색하다고 생각했어요. 중고등학교 다니며 이런 말을 쓸 때에도 뭔가 좀 아닌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자신들만의 고유한 것

 │

 │→ 자신들한테만 고유한 것

 │→ 자신들한테만 있는 것

 └ …

 

 ‘-만의’처럼 쓰는 토씨는 ‘-한테만 있는(또는 무엇하는)’으로 써야 알맞는 말을 밀어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나만의 모습”이 아닌 “나한테만 있는 모습”이라고 적어야 알맞지 않을까요. “내 모습”이라 하든지.

 

 “나만의 노래”가 아닌 “나만 아는 노래”나 “나만 부르는 노래”나 “나한테 남다른 노래”가 아닐까요. “나만의 책”이 아니라 “나한테 뜻깊은 책”이나 “나만 가진 책”이나 “나한테만 있는 책”이나 “내 손때가 묻은 책”은 아닐는지요.

 

 우리가 나타내려고 하는 뜻을 숨기게 하는 토씨 ‘-의’는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말하려는 이야기가 자꾸만 사그라들도록 하는 토씨 ‘-의’이지 않나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2008.09.04 10:22ⓒ 2008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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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씨 ‘-의’ #-의 #우리말 #우리 말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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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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