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민주주의의 죽음
김정환이 번역한 <햄릿>(아침이슬)을 읽었다. 요즘에는 무엇을 읽든 이명박과 연결하는 못된 버릇이 생기긴 했지만, 현실의 치명적인 요소요소를 밝혀주는 이 고전작품은 나의 번뇌가 꽤나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듯하다.
희곡 햄릿에 담긴 주제는 한마디로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는 자가 혼란스런 시대를 만나 파멸에 이르게 되는" 슬픈 이야기다. 셰익스피어는 인물마다 치명적인 결함을 집어넣어 현실감을 더욱 증폭시킨다. 리어왕은 끝간 데 모를 자부심과 노욕이 말년의 비극을 부추기고, 오셀로는 질투와 야심으로 자멸할 운명을 맞는다. 자못 현대인의 본질적인 특징에 닿아 있다. 우리는 저마다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 그건 그렇고 내가 이 고전 작품에서 오늘날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죽음을 바라보게 된 경위를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햄릿은 햄릿 왕의 어이없는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렇게 나는, 잠을 자다가, 동생의 손에, 목숨을, 왕관을, 왕비를 동시에 박탈당했니라, 내 죄의 꽃이 만개한 와중에 목숨이 잘렸니라" - 햄릿 왕의 유령, <햄릿> 45쪽
죽은 햄릿 왕만큼 지금의 '민주주의'를 잘 비유하는 인물은 없을 것이다. 우리들의 민주주의, 386 세대들이 숭앙해 마지 않던 87항전의 결실은 2008년 아예 없었던 시절로 돌아가고 말았다. 87년 이전의 시대, 아니 더 이전의 시대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형을 죽이고 왕비를 찬탈한 클로디어스는 이명박에 어울리는 인물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클로어디스에게 햄릿 왕이 너무나 허무하게 죽임을 당했다거나 이명박에게 소중한 민주주의가 너무나 쉽게 말살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다. 왕의 생명과 재산조차, 기본적인 민주주의의 권리조차 지키지 못했던 허약한 시대와 그 혼란상이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다는 것이 이 장면이 가리키는 바다.
햄릿은 왕의 죽음, 즉 민주주의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누가 아버지를 죽였는지 백일하에 드러났고 아버지를 죽인 자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명백한 상황에서도 클로어디스 이명박의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워 확인을 하려 든다. 이명박의 사과나 제도개선, 혹은 사퇴라는 공허한 구호를 외치며 이명박의 행동 하나하나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우리들의 모습은 햄릿보다 더 우유부단하다. 이명박이 누구인지, 민주주의를 죽인 것이 누구인지, 왕을 죽인 자가 누구인지 드러났다면 나의 행동과 결단도 분명해야 하리라.
거트루드 왕비는 왕이 죽고 나서 두 달 만에 남편을 죽인 살인마와 같은 침대를 쓰는 사이가 된다. 민주주의에 의해 임명된 권력기관은 거트루드 왕비와 어울린다.
맙소사, 하느님은 최상의 코미디 작가지! 사람이 유쾌하지 않을 수가 있나? 봐, 내 어머니가 얼마나 명랑해 보이는지, 아버지가 죽은 지 두 시간도 안 돼서 말야. - 햄릿이 계모에게, <햄릿>100쪽
햄릿은 끝내 클로디어스 왕의 일그러진 표정을 확인하기 위해 클로디어스가 아버지를 죽였던 장면을 넣은 연극을 상연한다. 거트루드 왕비가 클로디어스를 남편으로 맞은 것은 2달이지만, 연극의 상연 시간은 2시간 남짓이기 때문에 '2시간도 안 돼서'라고 말한 것이다.
이야기의 전모를 훑어보면 클로디어스 왕의 잔인한 살인과 거트루드 왕비의 변절이 눈에 들어오지만, 이들은 실질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명박이 국민들에게 어떤 힘을 가지지 않는 것과 같다. 그들에게 힘이 있다면 허울이 있을 뿐이다. 이들에 대한 증오로 눈을 돌린다는 것은 현실을 만든 장본인인 자신의 책임을 감추려는 술책에 불과하다. 결국 돌아오는 물음은 '허약한 민주주의' 하나뿐 없다. <햄릿>에서도 거트루드와 클로디어스 왕은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마지막까지 셰익스피어가 관심을 놓지 않았던 것은 주인공 햄릿이다. 햄릿은 우리들이다. 감수성 많고 우유부단하며 당대의 온갖 모순들을 짊어진 살아 숨쉬는 생활인이다. 정당한 것에 분노할 줄 알고, 분노를 행동에 옮길 줄 아는 소박한 인간형이다.
오필리아가 죽자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
<햄릿>에서 지나치기 쉬운 장면이지만, 가장 중요한 장면이 바로 '오필리아의 죽음'이다.
"버드나무 한 그루가 애루에 경사져 자라는 곳, 버드나무는 유리 같은 개울 표면에 백발 나뭇잎을 비추고 그곳에서 그녀는 환상적인 화환을 만들었단다. 야생꽃들, 쐐기풀, 데이지, 그리고 어린 자주빛 난초로, 이 난초를 방종한 목동들은 좀 숭한 이름으로 부르지만, 우리나라 정결한 처녀들은 죽은 사람의 손가락이라 하지. 거기 기울어진 나뭇가지 위에 잡초 화환을 걸어 주려 오르는데, 못된 가지가 부러졌고, 그때 잡초 묶음과 그녀 자신이 떨어졌단다, 울음 우는 개울 속으로. 그녀의 옷이 넓게 퍼졌다, 그리고 인어처럼 얼마 동안 개울이 그녀를 실어 날랐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옛날 가락 몇 마디를 읊조렸단다. 그녀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아니면 물속에서 사는 게 마땅한 피조물처럼. 하지만 오래갈 수는 없었지, 마침내 그녀 의상이, 물을 먹고 무거워져 그 불쌍한 아이를 끌어내렸단다, 감미로운 노래로부터 진흙창 죽음 속으로." - 거트루드 왕비의 증언, <햄릿> 164쪽
오필리아는 소박한 우리들의 가치를 상징한다. 예컨대 옛날에 운동을 한다, 조국을 위한다며 내팽개친 가족과 소박한 가치들이 오필리아에 모여 있다. 햄릿은 맹목적인 복수심에 불타 오필리아의 사랑을 한껏 조롱하였고 그녀의 아버지를 너무 쉽게 죽여버렸다. 그녀의 진심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신이자 그녀의 아버지인 폴로니어스와의 관계에서만 이해할 뿐이다. 진정한 가치가 혼탁한 가치 바로 옆에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소박한 가치는 배신을 당했고, 때문에 모든 것이 끝이었다.
언론인들은 언론자유와 독립언론을 외치지만 그것이 어디에서 만들어지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만의 언론자유'일 뿐이다. 독립언론이라는 '독립'조차도 동아투위, 조선투위 때 사용했던 개념에서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새로운 시대, 급격하게 돌아가고 있는 시대에 가장 한가한 사람들이 언론인들이다. 운동가들도 패권주의에 젖어 있다. 진보정당은 좁은 땅 위에서 기득권 싸움을 벌이다가 둘로 쪼개졌다. 당이 갈라짐과 동시에 민주주의의 심장이 쪼개졌다는 사실을 그들은 여태 모르고 있는 듯하다.
정치인들은 민생 민생 외치지만, 그 민생의 실체가 바로 오필리아이다. 오필리아의 죽음은 민생의 허무한 죽음이다. 월급쟁이들은 경제의 짙은 그림자를 아직 모르겠지만, 현장에서 실물경제를 느끼며 자영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금이 얼마나 잔인한 시간인지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오필리아는 햄릿을 구원해줄 마지막 기회였지만, 오히려 아버지 왕보다 더 헛된 죽음을 맞이했다. 결국 클로디어스도 죽고, 거트루드도 죽고, 햄릿도 죽고 모두 죽고 말았다.
<햄릿>의 이야기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햄릿이 클로디어스를 죽여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것? 배신자 거투르드 계모 왕비를 처단하는 것? 오필리아를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
햄릿에게 유령으로 현현한 아버지 왕은 그 답을 알고 있었다. 마치 신탁의 목소리처럼 모호하고 잔잔하게 햄릿에게 들려주었지만 햄릿은 그 진의를 알아듣지 못했다.
"비록 네가 복수를 추구하더라도, 네 심성을 부패시키지 말 것, 네 영혼이 네 어머니에게 어떤 벌도 획책하지 말 것. 그녀는 하늘에 맡길 것." - 아버지 왕, <햄릿> 45쪽
김정환의 <햄릿>은 독특하다. 시인이 시인을 번역했다는 사실도 재밌지만, 문체가 마치 거친 음식을 먹는 듯한 기분이다. 햄릿의 다른 텍스트를 보면 부드럽고 먹기 좋게 만들어놓은 고기 같지만 김정환의 <햄릿>은 의도적으로 투박한 언어를 많이 사용했다. 아니, 시인인데 이런 언어를 사용했을까? 그 비밀은 역자후기 맨 마지막 부분에 덧붙여 놓았다.
""'너무 매끄러움'은 인간 사회의 온갖 신분, 온갖 직업 및 분야의 현상, 상승 및 타락, 그리고 해체 과정을 셰익스피어 '당대적'으로 생생하게 보여 주는 광경을 놓치기 십상이고, 그렇게 되면 많은 것을 놓치는 것이다." - 역자해설, <햄릿>212쪽
2008.09.06 10:32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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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민음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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