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물고추로 쪄서 만든 '고추버무리' 이즈음이면 끝물고추에 튀김옷을 입혀 쪄서 말린 '고추부각'을 준비할 때다. 겨우살리 준비도 김장 다음에 그만한 게 없다. 금방 쪄낸 고추를 말리지 않고 그냥 먹으면 그게 바로 '고추버무리'다.
박종국
알곡 익는 소리 찰랑찰랑 댄다. 하지만 올해는 철이 이른 탓에 한가위를 코앞에 두었지만, 제사상에 오를 과일들은 아직 풀빛이다. 달력으로 계절을 따라잡기엔 뭔가 아귀가 맞지 않은 듯하다. 예년 같으면 추석 무렵 햇밤을 한 말이나 주웠다. 근데도 밤, 대추, 감이 저렇게 더디게 야물고 있으니 대목장 하나 보고 사는 사람들의 마음은 오죽할까.
그런데 이번 가을만큼은 고추농사가 ‘대풍작’이다. 고춧대 휘어지도록 빛깔 좋은 고추가 달랑달랑 매달렸다. 여름내 가마솥 불볕더위도 한통속이 되었고, 가당찮았던 장맛비도 크게 해작질을 하지 않은 덕분이다.
때문에 연일 바리바리 붉은 고추를 따내는 촌부들의 얼굴은 한낮에도 보름달이 떴다. 며칠째 돌아서면 발갛게 익은 고추를 따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12시간을 고추밭 이랑을 쫓아다녀도 시간이 부족하단다. 행복한 한숨소리가 고추밭 가득하다.
고추만큼 여느 음식과 찰떡궁합인 게 드물게다. 탱글탱글한 풋고추는 된장에 찍어먹거나 조려서 먹고, 마른 고추는 양념으로, 잎은 나물로 제 역할에 충실하다. 거기다가 이런저런 역할도 못하는 자투리 고추는 ‘부각’으로 신세를 고친다.
부각은 끝물고추를 밀가루나 찹쌀가루를 묻혀 찐 후 다시 덧가루를 해서 햇볕에 까슬까슬하게 말린 것이다. 고추부각은 신경 써서 만들면 말리는 데 조금은 시간이 걸리지만, 겨울 먹을 양식으로 오래 두고 먹는 재미가 솔솔하다. 특히, 튀겨서 초간장이나 양념 소금해 놓으면 어른아이 할 것 없이 간식으로, 반찬으로, 술안주로 금방 동이 난다.
요즘 시골 장에 가면 햇고추를 말려서 팔고 있다. 한창 고춧가루용 고추를 따서 말리는 시기인데, 벌써 부각고추가 나왔다는 것은 예상외다. 원래 부각용 고추는 발갛게 익은 고추를 따서 말리는 일이 끝나고, 날씨가 차가워졌을 때, 고춧가루용 고추감은 되지 못하고, 고춧대가지 끝에 손가락 한두 마다만한 것으로 사용한다. 끝물 고추다. 그것을 따다가 고추부각을 만들면 제격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고추를 구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