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감자 껍질을 참 많이도 깎았다. 감자를 갈아서 밀가루와 함께 반죽을 한다.
안소민
도대체 얼마나 깎았는지 모른다. 올 여름 한철, 참으로 무던히 깎았다. 아이들 간식 줄 생각으로 잘 아는 분에게 알이 자잘한 감자를 한 박스 구입해놓았다. 그리고 알이 작은 그 감자 껍질을 무던히도 깎았다. 반찬도 해먹고, 찌개도 해먹고, 전도 부쳐먹고 참으로 잘 먹었다.
그런데 입추가 지나자 감자도 조금씩 쭈글쭈글, 탄력이 없어지기 시작하고 싹도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박스에 몇알 남지않은 감자들을 보니 전성기를 지난 여배우를 보는 것같이 괜시리 마음이 짠해진다. 감자의 대미를 장식해주자, 화려한 은퇴식(?)을 치러주고 싶어서 생각해낸 것이 감자수제비였다. 마침 비도 부슬부슬 내리는 휴일 점심.
감자의 화려한 은퇴식을 치러주다 곱게 간 감자를 밀가루와 함께 넣고 반죽을 하기 시작한다. 손으로 밀가루 덩어리를 주물주물하면 손과 반죽이 하나같이 철썩 들어붙었다가 힘을 주면 깔끔하게 떨어져나간다. 밀었다 당기고, 붙었다 떨어지고 리드미컬하게 손을 움직이다보면 진다. 수제비 반죽에는 완급, 강약, 긴장과 이완이 항상 공존한다.
좋은 반죽은 깔끔하다. 반죽하는 손도 깔끔하고 반죽을 담은 그릇도 깔끔하다. 깔끔하다는 것은 반죽이 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깔끔한 반죽은 나중에 수제비 뜯을 때도 편하다. 반죽을 하다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손빨래를 하듯이 주물거리다보면 생각도 정리되고 어지러운 머릿속도 가지런해지는 것 같다. 거칠었던 반죽의 입자가 갈수록 고와지듯이 말이다.
가끔 아니꼬운 일이 있을때는 반죽을 패대기 쳐대곤한다. 패대기를 칠수록 반죽은 더욱 쫄깃해지고 부드러워진다. 그럴때는 밀가루 반죽덩어리가 밴댕이 속같은 사람마음보다는 훨 낫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연예인은 수제비를 보면 고생했던 지난 시절이 떠올라 지긋지긋하다고 했지만 나는 수제비를 보면 몇몇 얼굴이 떠오른다. 첫 번째는 남편 직장 옆에 있던 수제비집 아주머니였다. 당시 돈으로 2500원이었던 그 수제비는 신김치가 잔뜩 들어갔던 매콤했던 수제비였다.
을씨년스러운 날, 배가 출출할 때면 나와 남편은 그곳에 자주 갔다. 까딱하면 국물이 넘쳐흐를 정도로 그릇에 푸짐히 담아주었다. 날씨가 쌀쌀해지면 우리는 그 김치수제비의 얼큰한 맛과 김자옥을 닮았던 그 아주머니를 떠올린다. 그 아주머니는 지금도 밀가루 반죽을 하고 있을까?
바로 손윗 형님 얼굴도 빼놓을 수 없다. 형님은 우리 집에 오면 점심식사로 수제비를 자주 만들어주신다. 저녁식사를 마친 형님께서 밀가루 반죽을 하기 시작하면 '아, 형님이 내일 점심 수제비를 만들어주실 예정이구나'라는 생각에 속으로 흐뭇해했다. 멸치와 바지락, 다시마가 펄펄 끓고있는 국물에 잘 숙성된 수제비 반죽을 뜯어넣으며 두 며느리는 수다를 떨곤했다.
"동서, 참 이상해. 이거(수제비)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데 친정에 가면 정말 안되는 거 있지. 언제 우리 친정엄마 한 번 해드린다 해드린다 하면서도 한번도 못해드렸다. 다음에 가면 꼭 해드려야겠어."
형님은 그렇게 말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