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것들은 '山' 밑에 있다

[북한강 이야기310] 충만한 가을, 당신이 고맙다

등록 2008.09.10 15:48수정 2008.09.10 15:48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산이 좋아 산속 생활을 한 지 벌써 십오 년이 되어간다. 열다섯 해를 맞이하는 이 가을 산 속, 해가 솟아오르면 환한 산이 되고 달이 뜨면 검은 산으로 변한다. 눈을 마주하면 어느 곳에 무슨 나무가 있는지 금방 손짓하는 산, 아침이면 세수를 하고 옆에 서있는 산, 날마다 조금씩 새로운 모습으로 얼굴을 내미는 산, 열다섯 해를 보고 살아도 바라보면 가슴이 뛰는 산, 저 산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도 부러울 것이 없다.

 

 산밑에 올벼가 익어가고 있다. 올해는 철이 일러 풋바심을 해 송편떡을 만들어야 할까보다.
산밑에 올벼가 익어가고 있다. 올해는 철이 일러 풋바심을 해 송편떡을 만들어야 할까보다.윤희경
산밑에 올벼가 익어가고 있다. 올해는 철이 일러 풋바심을 해 송편떡을 만들어야 할까보다. ⓒ 윤희경

가을 아침이 열리고 있다. 산 밑 가을 아침은 옅은 안개로 자욱하다. 꿈처럼 다가와 바람처럼 흩어지는 안개꽃, 하얀 머리를 어슬어슬 들고 일어나 몸 전체를 뽀얗게 뒤덮는다. 흰 실타래를 풀어내듯 밀려오는 하얀 입김들, 별안간 몸 전체가 분해 작용을 하며 산 속으로 붕 솟아오른다.

 

 대추볼이 발그레 물들고 있다. 가을은 벌써 대추볼에 달랑 내려와 깊은 쉼을 몰아쉬고 있다
대추볼이 발그레 물들고 있다. 가을은 벌써 대추볼에 달랑 내려와 깊은 쉼을 몰아쉬고 있다윤희경
대추볼이 발그레 물들고 있다. 가을은 벌써 대추볼에 달랑 내려와 깊은 쉼을 몰아쉬고 있다 ⓒ 윤희경

 

헛기침을 하며 새벽을 맞이한다. 안개를 털어내며 텃밭 돌아 긴 논둑을 넘는다. 흙도 만져보고 청벌레도 떼어내고 물꼬도 터놓는다. 논배미를 넘어가는 발자국 소리에 벼 포기들이 통통 불룩해온다. 가을배추와 김장 무들도 제법 자라 잎들이 팔랑팔랑, 가을 아침이 더욱 싱그럽다.  

 

 알밤이 벌어..서로 헤어질 날을 기약하며 마지막 사랑을 속삭속삭..
알밤이 벌어..서로 헤어질 날을 기약하며 마지막 사랑을 속삭속삭..윤희경
알밤이 벌어..서로 헤어질 날을 기약하며 마지막 사랑을 속삭속삭.. ⓒ 윤희경

안개 속에서 올 마지막 씨를 뿌린다. 알타리무, 청갓, 열무, 쪽파 씨앗들을 흙으로 덮다 둘러보니 어느새 나도 작은 씨알로 고물거린다.  

 

뿌연 안개 걷히고 금세 산 전체가 햇볕으로 가득하다. 가을 산 아래 가을볕이 좋다. 숨쉬기가 부드럽고 편하다. 신선한 기운이 가득 찬 가을 산, 그 산 아래 가을볕, 볕이 하도 맑아 숨쉬기가 미안할 정도다. 그냥 보고 듣고 느끼며 온 몸으로 빛을 맞이한다. 한가로운 정오의 가을 볕, 갑자기 울음이 터질 것만 같고, 산을 향해 소리라도 질러보고 싶은 한낮의 정적이다.

 

 생선 망신은 꼴뚜기, 과일 망신은 모과, 우리집 모과는 참 못난이다. 그러나 향기만은 끝내준다.
생선 망신은 꼴뚜기, 과일 망신은 모과, 우리집 모과는 참 못난이다. 그러나 향기만은 끝내준다.윤희경
생선 망신은 꼴뚜기, 과일 망신은 모과, 우리집 모과는 참 못난이다. 그러나 향기만은 끝내준다. ⓒ 윤희경

산 속 생활 열다섯 해, 산 아래 산이 하나 더 있다. 산 밑에 또 다른 작은 산, 처음 귀촌할 때부터 많은 들꽃과 야생화를 집과 밭 둘레에 심었다. 잘은 모르지만 들꽃이 한 백여 종, 나무들도 수십여 그루가 넘을 듯싶다. 그동안 하나둘 심은 나무들이 집 가까이에서 동무처럼 다정하게 자라고 있다. 지금은 나무들이 자라 산 밑 오막살이집을 에워싸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면 동그랗게 피어오르는 연기만이 그곳에 집이 있음을 말해 준다.

 

 배를 제삿상에 올려야 되는데 첫손님 산까치가 먼저 시식을 했다. 그래, 나눠 먹자.
배를 제삿상에 올려야 되는데 첫손님 산까치가 먼저 시식을 했다. 그래, 나눠 먹자.윤희경
배를 제삿상에 올려야 되는데 첫손님 산까치가 먼저 시식을 했다. 그래, 나눠 먹자. ⓒ 윤희경

가을 햇볕이 작정 없이 내려 쪼이고 있다. 가을볕 속으로 맑은 공기가 따라나서나 싶더니 도처에 가을 열매들이 풍성하고 충만하다. 오막살이를 둘러싼 그리운 것들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산수유가 벌써 발갛게..주근깨가 송알솔알.
산수유가 벌써 발갛게..주근깨가 송알솔알.윤희경
산수유가 벌써 발갛게..주근깨가 송알솔알. ⓒ 윤희경

 

며칠이면 추석이다. 고향을 숨차게 달려오는 모든 이들에게 풍성하고 넉넉한 가을 선물들을 듬뿍 나누어주고 싶다. 당신들에게 하루가 투명하게 다가서는 가을 산과 햇볕과 볕이 익혀낸 열매들을 안겨주고 싶다. 도시에서 잃어버린 고향냄새와 향기와 그리운 것들을 되돌려주고 싶다.

 

 고향 감 잎이 벌써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어서와요, 당신, 여기는 고향입니다.
고향 감 잎이 벌써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어서와요, 당신, 여기는 고향입니다.윤희경
고향 감 잎이 벌써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어서와요, 당신, 여기는 고향입니다. ⓒ 윤희경

 

성큼성큼 다가서는 가을, 요 며칠동안 귀뚜리 소리에 잠이 오지 않아 뜰 밖으로 나아가 서성거린다. 음력 팔월 초아흐레 상현달이 산을 넘어가고 있다. 그리운 것들은 산 밑에서 소록소록 잠이 들고….

덧붙이는 글 | 행복하고 넉넉한 추석 맞이하시길...솔바우

2008.09.10 15:48ⓒ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행복하고 넉넉한 추석 맞이하시길...솔바우
#고향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사유화 의혹 '허화평 재단' 재산 1000억 넘나 사유화 의혹 '허화평 재단' 재산 1000억 넘나
  2. 2 중학교 졸업여행에서 장어탕... 이건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 중학교 졸업여행에서 장어탕... 이건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
  3. 3 보수논객 정규재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 보수논객 정규재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
  4. 4 이런 곳에 '공항'이라니... 주민들이 경고하는 까닭 이런 곳에 '공항'이라니... 주민들이 경고하는 까닭
  5. 5 남자선배 무릎에 앉아 소주... 기숙사로 가는 내내 울었다 남자선배 무릎에 앉아 소주... 기숙사로 가는 내내 울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