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 정전정전 앞에 드넓게 펼쳐진 운동장만한 크기의 마당에 박힌 돌들도 눈을 무겁게 만든다
이종찬
임진왜란 때 불 탄 종묘 정전, 광해군 때 새롭게 손질 사적 제125호 종묘는 토지와 곡식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사적 제121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시하고 있는 제례 공간이자 종묘제례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1995년 12월)된 찬란한 우리 문화유산이다. 그중 정전은 종묘의 중심 건물로 영녕전(보물 제821호)과 구분키 위해 태묘(太廟)라 부르기도 한다.
문화재청 자료에 따르면 종묘는 1392년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1394년 10월28일 터를 닦기 시작해 태조 4년 1395년 9월29일에 새 궁궐과 함께 세웠다. 그때 종묘는 대실(大室)이 7칸이었으며m 대실 안에는 석실(石室) 5칸이 있었다. 그리고 익랑(翼廊, 대문의 좌우 양편에 이어서 지은 행랑)을 각각 2칸씩 이어 지었다.
이와 함께 공신당 5칸, 신문(神門) 3칸, 동문 3칸, 서문 1칸을 짓고 담을 빙 둘러 쌓았다. 담 밖에는 신주 7칸, 향관청 5칸, 좌우 행랑 각각 5칸, 남쪽 행랑 9칸, 재궁 5칸을 지었다. 종묘가 완성되자 태조는 1395년 10월, 개성에 있었던 태조의 4대조인 목조와 효비, 익조와 정비, 도조와 경비, 환조와 의비의 신주를 모셨다.
종묘는 태종 때에 이르러 모습이 크게 달라진다. 태종은 정전 건물 양끝에서 직각으로 앞으로 꺾여 나온 동,서월랑(東西月廊)을 세우고, 종묘의 담 바깥 서남쪽 모퉁이에 있는 공신당을 종묘 담 안 묘정(동쪽 계단) 아래로 옮긴다. 이와 함께 제기고와 재생방 등 부속건물을 지어 제례기능을 빠짐없이 갖춘다.
태종은 이때 향관 처소도 재전 동남쪽 낮은 곳으로 옮기게 하는 것은 물론 둘레 담과 하마비까지 세운다. 명종 때에는 정전 4칸이 더 만들어져 모두 11칸이 된다. 하지만 종묘 정전은 불행히도 임진왜란 때 불타게 된다. 종묘는 그 뒤 선조 1608년(41년) 1월에 공사를 다시 시작해 5개월 뒤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완공된다.
종묘 정전은 이때에도 11칸이었다. 하지만 영조 2년, 1726년에 4칸을 더 만들었고, 헌종 2년 1836년에 또다시 4칸을 더 늘려 지금의 19칸이 되었다. 정전은 조선시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태조 이성계의 4대조(목조, 익조, 탁조, 환조) 신위를 모셨다. 하지만 그 뒤부터 집권한 왕의 4대조(고조, 증조, 조부, 부)와 공덕이 있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