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줄기거름을 잘 준 탓인지 호박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어 나가 아랫집 할머니 집을 넘보고 있다.
송상호
할머니의 웃는 얼굴로 봐선 뭔가 나에게 따질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아 일단은 안심이 됐다. 어쨌든 할머니가 몇 번 나를 만나고자 했다고 하시니 궁금할 수밖에. 겸연쩍은 미소를 흘리시고 머리를 긁적이며 할머니가 그제야 입을 떼신다.
"아저씨네 호박 있잖어유. 그 놈아가 우리 집 밭으로 넘어 온 거 아니겄어. 그랴서 못 넘어오도록 정리를 좀 하다가 툭 떨어진 거 아녀. 허허허허. 그 호박 하나를 내가 집에 가서 해 묵었지 뭐여. 그리고 호박 한 개 더 열려 있는 것은 지난 번 아저씨네 집에 갔다 놓았잖여요. 그랴서 오늘 그 말 할라고 온 거지유. 아저씨네 호박 한 개 내가 묵었다는 이야기 할라고."그 말씀을 하시는 할머니는 그제야 십년 먹은 '체증'을 가라앉히시듯 안도의 웃음을 웃으신다. 할머니 나름대로는 아주 마음에 걸리셨나 보다. 허리도 꾸부정하신 할머니가 그것을 고백하기 위해서 몇 번을 오가셨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사실 그것을 모른 척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도 없는데. 그 사실은 할머니만 아는 사실인데 말이다.
시골 팔순할머니가 이렇게 고해성사(?)를 하시는데 보속해주지 않을 가톨릭 신부가 있겠는가. 나는 가톨릭 신부는 아니지만, 거룩한(?) 마음으로 할머니에게 말을 건넨다.
"우리 호박이 주책이지. 왜 자꾸 할머니 밭으로 건너가서 귀찮게 했대요? 암튼 할머니 참 잘하셨어요. 제가 호박을 드려도 드리는 건데 알아서 잘 따 잡수셨으니 제가 감사하죠." 이 정도면 훌륭한 처방이 아닐까. 그런 후 본 할머니의 얼굴. 얼굴엔 온통 주름이 주글주글하고 이빨은 남은 게 별로 없어서 입 가운데로 주름이 모여 있는 전형적인 시골할머니의 얼굴이지만, 할머니의 얼굴이 어쩌면 그렇게 예뻐 보이는지. 돌아서 가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내내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는 것은 인지상정. 이 모습을 함께 지켜본 더아모의집 소녀 두 명(딸과 딸의 친구)에게도 살아있는 교훈이 된 듯싶다.
사실 이런 비슷한 일이 처음이 아니다. 십수 일 전 그땐 바로 아랫집 할머니가 호박을 아예 들고 오신 것. 우리 호박이라며 들고 오신 호박이 지금 연결해서 생각해 보니 오늘 오신 바로 윗집 할머니가 주신 호박을 아랫집 할머니가 들고 오신 것이다. 그 때 오신 아랫집 할머니가 나의 손을 잡고 우리 호박 줄기로 이끌어 가신 것이다.
"아. 얘기 아버지. 여기 이 호박을 따가기 좋으라고 내가 이렇게 줄기와 잎을 제쳐서 볼 수 있게 벌려 놓았는데 안 가져 가셨더만. 지금 따가유.""예 예. 할머니. 고마워유. 이렇게 신경 써주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