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할머니의 배꼽 잡는 호박서리 고해성사

호박 줄기가 잘 뻗어 나가는 바람에 생긴 이웃집 할머니들과의 해프닝

등록 2008.09.12 14:09수정 2008.09.12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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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아모의집' 마당에서 아이들과 한참 고물을 정리하는 중이다. 한 달 넘게 모은 고물을 팔아서 딸아이 휴대폰 요금을 내기 위해서다. 그런데 바로 윗집 할머니가 마당으로 뒤뚱뒤뚱 걸어오신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아. 아저씨가 계셨구먼."
"어쩐 일이세유? 할머니."
"아, 지난번에도 들렀는디 안 계시더만. 이제야 만났네."

호박줄기 거름을 잘 준 탓인지 호박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어 나가 아랫집 할머니 집을 넘보고 있다.
호박줄기거름을 잘 준 탓인지 호박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어 나가 아랫집 할머니 집을 넘보고 있다. 송상호

할머니의 웃는 얼굴로 봐선 뭔가 나에게 따질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아 일단은 안심이 됐다. 어쨌든 할머니가 몇 번 나를 만나고자 했다고 하시니 궁금할 수밖에. 겸연쩍은 미소를 흘리시고 머리를 긁적이며 할머니가 그제야 입을 떼신다.

"아저씨네 호박 있잖어유. 그 놈아가 우리 집 밭으로 넘어 온 거 아니겄어. 그랴서 못 넘어오도록 정리를 좀 하다가 툭 떨어진 거 아녀. 허허허허. 그 호박 하나를 내가 집에 가서 해 묵었지 뭐여. 그리고 호박 한 개 더 열려 있는 것은 지난 번 아저씨네 집에 갔다 놓았잖여요. 그랴서 오늘 그 말 할라고 온 거지유. 아저씨네 호박 한 개 내가 묵었다는 이야기 할라고."

그 말씀을 하시는 할머니는 그제야 십년 먹은 '체증'을 가라앉히시듯 안도의 웃음을 웃으신다. 할머니 나름대로는 아주 마음에 걸리셨나 보다. 허리도 꾸부정하신 할머니가 그것을 고백하기 위해서 몇 번을 오가셨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사실 그것을 모른 척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도 없는데. 그 사실은 할머니만 아는 사실인데 말이다.

시골 팔순할머니가 이렇게 고해성사(?)를 하시는데 보속해주지 않을 가톨릭 신부가 있겠는가. 나는 가톨릭 신부는 아니지만, 거룩한(?) 마음으로 할머니에게 말을 건넨다.


"우리 호박이 주책이지. 왜 자꾸 할머니 밭으로 건너가서 귀찮게 했대요? 암튼 할머니 참 잘하셨어요. 제가 호박을 드려도 드리는 건데 알아서 잘 따 잡수셨으니 제가 감사하죠."

이 정도면 훌륭한 처방이 아닐까. 그런 후 본 할머니의 얼굴. 얼굴엔 온통 주름이 주글주글하고 이빨은 남은 게 별로 없어서 입 가운데로 주름이 모여 있는 전형적인 시골할머니의 얼굴이지만, 할머니의 얼굴이 어쩌면 그렇게 예뻐 보이는지. 돌아서 가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내내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는 것은 인지상정. 이 모습을 함께 지켜본 더아모의집 소녀 두 명(딸과 딸의 친구)에게도 살아있는 교훈이 된 듯싶다.


사실 이런 비슷한 일이 처음이 아니다. 십수 일 전 그땐 바로 아랫집 할머니가 호박을 아예 들고 오신 것. 우리 호박이라며 들고 오신 호박이 지금 연결해서 생각해 보니 오늘 오신 바로 윗집 할머니가 주신 호박을 아랫집 할머니가 들고 오신 것이다. 그 때 오신 아랫집 할머니가 나의 손을 잡고 우리 호박 줄기로 이끌어 가신 것이다.

"아. 얘기 아버지. 여기 이 호박을 따가기 좋으라고 내가 이렇게 줄기와 잎을 제쳐서 볼 수 있게 벌려 놓았는데 안 가져 가셨더만. 지금 따가유."
"예 예. 할머니. 고마워유. 이렇게 신경 써주셔서."

호박줄기2 호박줄기가 뻗어 나가듯 일만 잘된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신명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이 호박 줄기는 또 다른 쪽으로 뻗어 나간 것으로서 우리가 호박을 모두 감당하기에 버거울 정도. 사실 우리가 호박 따는 것에 크게 신경 써지 않아 이런 해프닝이 생긴 것일 듯.
호박줄기2호박줄기가 뻗어 나가듯 일만 잘된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신명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이 호박 줄기는 또 다른 쪽으로 뻗어 나간 것으로서 우리가 호박을 모두 감당하기에 버거울 정도. 사실 우리가 호박 따는 것에 크게 신경 써지 않아 이런 해프닝이 생긴 것일 듯.송상호

지금 할머니가 설명해준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잘 알겠는가. 윗집 할머니가 주신 호박을 아랫집 할머니가 직접 들고 오셔서 주시면서 자신은 다른 호박을 건드리지 않고 우리가 잘 따가도록 벌려 놓았다며 또 다른 고해성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고. 이 나쁜 놈의 호박이 줄기를 잘 뻗어 나가는 바람에 여러 사람 시험에 들게 하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기분은 참 좋을 수밖에.

덧붙이는 글 | ‘더아모(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모임)의 집은 경기 안성 금광면 장죽리 시골 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홈페이지는 http://cafe.daum.net/duamo 이며, 본인은 이곳의 목사이다.


덧붙이는 글 ‘더아모(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모임)의 집은 경기 안성 금광면 장죽리 시골 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홈페이지는 http://cafe.daum.net/duamo 이며, 본인은 이곳의 목사이다.
#더아모의집 #송상호목사 #호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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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목사질 하다가 재미없어 교회를 접고, 이젠 세상과 우주를 상대로 목회하는 목사로 산다. 안성 더아모의집 목사인 나는 삶과 책을 통해 목회를 한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문명패러독스],[모든 종교는 구라다], [학교시대는 끝났다],[우리아이절대교회보내지마라],[예수의 콤플렉스],[욕도 못하는 세상 무슨 재민겨],[자녀독립만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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