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길 건너 귀곡산장에 묵었다

[한국의 산티아고 가는 길, 제주 올레를 걷다③] 상처입는 길, 제주올레

등록 2008.09.18 15:32수정 2008.09.18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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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8년 8월 27일 수요일
여정: 제주 중문에서 화순공소까지
날씨: 쨍쨍쨍쨍쨍
만난 사람들: 없음
생각할 것: 세르반테스의 '유리 학사님'과 나 '걷기 학사(과정 중)'의 관계는?

"학사님, 당신이 불행해 보여 마음이 아파요. 하지만 울 수도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하죠?"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루카 23.28)"
- <유리학사>, 세르반테스


천제연에서 산은 물, 물은 산?
천제연에서산은 물, 물은 산?유지형

자정이 넘도록 TV를 본 탓에 무거운 머리, 발톱이 빠질 듯 곪은 발을 동여매고 다시 나서는 길. 이른 아침의 관광단지는 한산하다 못해 스산한 분위기였어. 어제 끊어진 길을 이어붙여 나갔지. 까마득한 발치 아래로 깎아지른 천제연폭포 절벽의 나무계단을 따라 바닥으로 내려가자 맑은 거울처럼 잘 닦인 물가는 절벽을 투명하게 비추고 있었어.

폭포를 뒤로 하고 해안가에 가까워지자 저 멀리 하얀 모래사장이 눈에 들어왔어. 저곳이 아마 중문 해수욕장이겠지? 빨리 뛰어가서 바닷물에 두 발을 담그고 싶었어. 바닥에 푹푹 빠지는 등산화를 벗어 가방에 매달고 맨발로 모래를 밟았어. 고운 감촉이 발가락 사이로 파고들어 살갗을 간질였지.

철썩철썩 파도가 다가와 포말처럼 하얗게 부서지며 발목을 적셨어. 물은 생각보다 따뜻했지. 어쩌면 이런 물빛이 세상에 있을까, 바닥이 환하게 보였어. 방심하는 사이 꽤 거센 파도가 무릎까지 치고 들어오면 "꺄악!" 소리를 지르며 뒤꽁무니를 뺐지. 그렇게 파도와 줄다리기를 이어갔어. 뒤로 점점이 남겨진 나의 발자국은 햇빛 아래 빛나고 있었어.

원두막 쉼터에 앉아 발을 잘 말리고 모래를 털어낸 후 먼발치로 펼쳐진 길을 유심히 살폈지. 아무리 봐도 시커먼 돌밭인데, 길이 있긴 한 걸까? 마음 같아선 하루 종일 이 상냥한 바닷가에서 몸을 식히며 신선놀음을 하고 싶은데…. 아쉬움 반, 두려움 반으로 망설이던 마음을 과감히 접고 자리에서 일어났지. 어쨌든 가야 하잖아.

중문해수욕장에서 반짝이는 발걸음
중문해수욕장에서반짝이는 발걸음유지형



가자, 가자! 나는 지금 걷기 공부 중

때마침 길가에 버려진 대나무를 주워 바위를 탁탁 찍으며 걸어갔어. 과연 시작된 길은 지금까지의 친절함과는 대조적이었어. (또 다시!) 멋모르고 기어올라간 절벽에는 원시시대 선조들이 몸을 숨겼을 법한 동굴이 나타났어. 눅눅한 습기와 음습한 기운 덕분에 쾌적한 주거환경은 못 되었지만 폭풍이 휘몰아치는 수만년 전 사람들에겐 생존을 위한 피신처가 되기에 충분할 법 했어.


'존모살 해안' 바위틈에는 온갖 쓰레기들이 박혀 있었는데 생김새가 낯설어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이웃나라인 일본과 중국에서 온 음료수 병과 합성세제 병이었어. 세상에나, 너희들은 파도를 타고 이 곳까지 원정을 왔니? 양손에 꼭 쥔 대나무 덕분에 쓰레기를 주워갈 수도 없었지.

오랜 시간 뜨거운 태양과 새카만 돌들이 뿜어내는 열기 사이에서 파김치가 되어 걷고 있었지. 머리가 어지러웠어. 멀리 새하얀 등대가 서 있었지. 휘청거리는 다리를 끌고 도착한 곳은 작은 해안가 마을인 '대평포구'. 한적한 동네는 고요 속에 잠든 채 인적이 뜸했어. 자석처럼 이끌리듯 멀리 보이는 작은 원두막 아래 평상으로 걸어갔어.

중문에서 어쨌든 가야 할 길
중문에서어쨌든 가야 할 길유지형

대평포구에서 달콤한 쉼터
대평포구에서달콤한 쉼터유지형
어젯밤 준비해 둔 김밥 한 줄과 사과 한 알을 점심으로 먹고, 배낭을 베개 삼아 그늘 아래에 몸을 뉘였어. 발치에서 거세게 불어오는 햇빛에 달구어진 미적지근한 바닷바람은 끈적하게 몸에 달라붙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어.

긴팔 바람막이를 이불 삼아 몸을 덮고 가방 속의 책을 꺼내 한 장, 두 장 넘겼지.

주인공은 자신을 흠모하는 여자가 억지로 최음제를 먹여 정신이 나가 버리고야 말았어. 죽을 고비를 넘기고서는 '내 몸은 유리로 되어 있다'며 깨어질라 부서질라 사람들을 멀리하고 지푸라기 속에서 잠을 자고 모든 행동을 가려서 했어. 그리고 속세의 사람들에게 신랄한 직언을 서슴지 않았지. 사람들은 그를 '유리 학사님'이라고 불렀어.

자기의 몸이 유리라고 생각하며 고행하는 학사님이 추운 겨울날 짚 속에 자신의 몸을 파묻고 새우잠을 자는 모습을 떠올리던 나는 제주도 작은 마을의 원두막 아래 평상에서 낡은 겉옷을 이불삼아 잠들고야 말았지. 상쾌한 기분으로 눈을 뜨자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간 후였어.

달콤한 시에스타, 쉼을 마치고 새롭게 시작되는 5코스로 출발했어. 등산에 가까운 구간이라는 이야기를 떠나오기 전부터 들었기 때문에 마음가짐을 단단히 했지. 서늘한 숲의 한기를 즐기며 잘 닦인 언덕을 오르는 기분은 상쾌했어. 손에 꼭 쥔 두 개의 대나무는 그 가치를 톡톡하게 해 주었어. 정상에 올라 옹기종기 모인 지붕, 칼같이 잘린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바라보며 참 잘 왔다고, 참 좋은 길이라고 생각했지.

내가 여기서 황천길을 가는구나

여름 한 철 허리까지 자란 잡풀이 길의 흔적을 뒤덮고 있어 어림짐작으로 내리막을 따라 걸어왔어. '이제 다 끝났나 보다, 다시 바다를 따라가야지'하고 마음을 놓고 있었지. 그런데 이상하게 길은 다시 오르막을 향하고 있었어. 고개를 흔드는 밀밭에 물을 대는 수로를 따라가면서도 '이게 아닌 것 같은데…?' 반신반의했어. 검은 날개를 퍼덕이는 나비는 길바닥에 딱 붙은 채로 더듬이를 움직이고 있었어. '이 길 맞아?' 몇 번을 물어봐도 답을 줄 리가 없었어.

어쨌든 파란 화살표를 따라 가 보자는 마음에 가파른 길을 힘겹게 올랐어. 그런데 분명 어렴풋하게 길의 흔적이 느껴졌지만 온갖 잡풀과 날카로운 덩굴줄기가 가득했어. 지팡이로 거미줄을 걷어내며 걸으면서도 내가 지금 맞는 길로 가는지 도저히 확신할 수 없었어. 때마침 "푸드득"하고 날아오르는 꿩의 날갯짓에 내가 더 놀라 "히익!"소리가 절로 튀어나왔지.

잔뜩 긴장해 그저 허겁지겁 이 미로를 빠져나가는 데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날벌레와 산모기들이 날카로운 바늘을 내 온몸에 꽂아대는 것도 알 수 없었어. 먼발치는 낭떠러지, 아득한 밑바닥에는 탁한 물이 고여 있었어. 산길을 오르내리고 미끄러지고 엉덩방아를 찧고 네 발로 엉금엉금 기고 있었지. 분명 멀리서는 모터 소리, 차 소리가 들리는데 나는 대체 어느 메에서 야생탐험(?)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지.

야생(화) 탐험 아름다운 만큼 거칠었던 길
야생(화) 탐험아름다운 만큼 거칠었던 길유지형

'내가 여기서 황천에 가는구나, 그래서 그곳이 황개천이었구나.'

영영 이어질 것 같았던 막막함은 어느 작은 마을의 돌담을 따라 겨우 끝이 나고, 파란 화살표에 대한 알 수 없는 배신감에 치를 떨며 나는 도로를 찾기 시작했어. 겨우 찾아낸 포장길을 따라 걸으며 쌩쌩 달리는 차들과 자전거 하이킹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더없이 반가웠지. 때마침 눈앞에는 기다리던 목적지, H 동네의 이름이 새겨진 커다란 바위가 서 있었어.

긴장이 풀렸는지 그제서야 온 몸의 통증이 느껴졌어. 잔뜩 열을 받아 후끈거리는 양팔은 잡풀과 덩굴에 쓸려 베인 상처, 모기에게 통행세를 매혈한 덕에 부풀어 오른 흔적이 가득했지.

발목으로부터 전해지는 찌르는 듯한 감각 탓에 빨리 숙소를 찾아 쉬고 싶었어. 편의점과 우체국에서 물건을 사고 나서 부지런히 걸어 숙소를 찾아보기로 했지.

앗, 이 민박집 뭔가 이상하다

다시 화살표가 이어질 H 해수욕장으로 향하는 길, 차도 인적도 없는 도로변에 홀로 자리한 한 민박집에 들어갔어. 아침 일찍 떠날 도보 여행자라고 사정해 방 하나를 겨우 얻었지. 우선 짐을 내려놓고 H 공소를 방문하기로 했어.

"원래 손님을 안 받는데…. 여자 혼자 다녀서 어쩌려고 그래?"

주인의 이야기가 이상하게 앙금처럼 가라앉았어.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 올라가 찾아간 공소는 정면의 성당과 후면의 유치원이 결합된 양식이었어. 슬리퍼를 갈아 신고 실내에 들어서자 "쉿-, 조용히 하자"하고 아이들을 타이르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지. 가만 앉아 기도하고 사진을 찍은 후 조용히 성당을 나왔어.

저녁거리와  차가운 맥주를 대신해 시원한 제주우유 한 팩을 사들고 동네의 용천수 탕에서 물장구를 치고 돌아왔지. 그런데 숙소로 들어서는 유리문이 잠겨 있었어. 똑똑 노크를 했더니 주인이 당황하며 문을 열어주었어. 뭔가 이상하네?

방에 발수건 할 수건이 없어 한 장을 달라고 해 들고 왔지. 샤워와 빨래를 마치고 께름칙한 기분이 들어 수건으로 방바닥을 한 번 훔쳤는데 시커먼 먼지가 잔뜩 묻어나왔어. 역시 이상하네?

파리 한 마리, 바퀴벌레 두 마리를 죽이고 적적한 기분이 되어 TV를 켰어. 어쨌든 빨리 자고 내일 일찍 출발하겠다는 생각에 여름에는 어울리지 않는 두꺼운 요를 깔고 그 위에 배를 깔고 일기를 적어나가고 있었어. 김밥 한 줄을 야금야금 먹고 있는데 하얀 요 자리에 까만 깨 같은 것이 톡 떨어져 있었지. 김밥의 깨인가? 내가 먹는 김밥엔 깨가 없는데.

시선을 돌려 요를 쳐다보았더니 깨 같은 것들이 여기저기서 꼬물꼬물 움직이고 있었어. 이건 벼룩인가, 침대벌레인가, 빈대인가, 대체 무엇인가?! 나는 햇빛에 시커멓게 탄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어.

애초부터 '뭔가 이상하네?'의 연속이었어. 귀곡산장(!) 같은 숙소의 위치, 주인의 미심쩍은 응대, 잠겨버린 현관문, 텅텅 비어버린 다른 객실들, 시커먼 먼지가 가득한 방의 상태, 비워지지 않은 휴지통, 파리 한 마리와 바퀴벌레 두 마리, 바깥이 전혀 보이지 않는 실내, 게다가 요 위에 한가득 모여 춤을 추는 정체불명의 벌레들까지….

내 머리는 이미 온갖 가능성을 셈하고 있었지. 누가 와서 잡아먹는 건 아냐? 팔아가는 건 아닐까? 동네에서 본 단란주점 간판들은 왜 내 기억에 콕 박혀 반짝이며 돌아가고 있는 거야?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야? 이 모든 것들은 무엇을 얘기하려는 신호인 거지?!

잠긴 문, 빈 객실, 시커먼 방... 악!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에서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었어. "나갈 테니 방값 돌려주세요"하고 주인에게 말할 배짱도 없었어. 그저 물기 가득한 빨랫감을 돌돌 말아 구겨 넣고 발소리를 죽인 채 계단을 내려와 신발장의 등산화에 발을 넣고 붙들리지 않기 위해(?) 황급히 뛰쳐 나왔어. 시커멓게 내려앉은 어둠, 저 멀리 수평선에서 명멸하는 붉은 조명은 불안감을 더했지. 곧 해수욕장 근처에 닿아 여행자들로 북적이는 민박집에 방을 얻었어.


"혹시 저 위쪽 민박집 아세요?"

"우린 몰라요. 서로 다 알지를 못하니까, 왜요?"

심드렁한 반응이었어. 겨우 몇 분 남짓 떨어진 곳에 있는 같은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모른다니, 이 동네는 정말 미심쩍은 부분이 가득했어.

오늘의 미사 안내 제주 화순 공소에서
오늘의 미사 안내제주 화순 공소에서유지형

새로 얻은 방 역시 그리 편한 곳은 되지 못했지만 적어도 옆방 사람들의 꺄르르 웃음소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했어. 적어도 여기에서는 불시에 방문이 열리고 주머니가 털릴 거란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될 테니까.

타는 속, 흥분된 신경은 도저히 잠들 수 없을 것 같았지. 술이라도 사다가 마셔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비닐봉지에 담아 들고 온 제주우유가 떠올랐어. 반 리터짜리 고소한 우유를 단숨에 꿀꺽꿀꺽 들이붓고 나니 속이 울렁거렸지.

이것들은 모두 나의 착각일까? 나는 모든 우연들에 턱없이 민감하게 굴었던 것일까? 나는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자기가 유리로 되어 있어서 잘못하면 산산조각 부서지게 된다고 호들갑을 떨던 유리 학사는 대체 내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내일이면 마치게 될 이 여행은…,
어떻게 되는 걸까?

정리: 6시 전후 천제연폭포 길 - 중문해수욕장 - H호텔 앞 - 존모살 해안 - 오후 대평포구 - 황개천 입구 - 가세기 마을올레 - 안덕면 - H리 - 화순공소
지출: 관제엽서 10장 / 안덕우체국 / 2,200원 포도맛 폴라포 / F마트/화순 / 700원 1차 숙박비 / 귀곡산장/화순 /20,000원 김밥 2줄+떡볶이&순대/E분식/ 4,000원 청포도캔디+제주우유/H마트 / 1,650원 2차 숙박비 /H민박 / 20,000원 합계 / 48,550원
#제주올레 #도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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