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만에 만나는 친구가 호텔에 찾아왔다.
오문수
장티푸스에 걸려 죽음 앞까지 갔던 친구
'깨복쟁이' 친구. 혹은 소위 'XX친구'라 부르는 그를 9월초 30년 만에 뉴욕에서 만났다. 원래 소탈한 성격에 사업이 잘 풀려서 그런지 임신한 배 같다. 친구와는 그동안 고향 동창 카페에서만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냈다. "아무도 찾아주는 친구가 없어 외로웠다"는 친구는, 내가 뉴욕에 간다는 소식에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려고 한다"고 썼다.
1960년대 초등학교를 다닌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그랬지만 너무 가난했다. 시골에서 중학교 진학한 사람은 그래도 형편이 약간 나아 굶지는 않던지, 아니면 부모가 자식만은 이 지독한 가난을 면케 하겠다는 일념으로 당신들은 굶으면서도 학교에 보낸 집안 출신이다.
절반이 여학생인 6학년 2반 우리 반 학생 36명 중 여학생은 단 한명도 중학교 진학을 못하고 서울로 시집살이를 가던지 집안일을 도왔다. 나는 중학교 1학년쯤에 집에 오신 손님이 두고 간 빵(시골 상점에서 파는 롤케익처럼 둘둘 말린 빵)을 생전 처음 먹어보고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도 있구나!"하고 며칠간 입속에서 그 맛을 잊지 못했다.
이 친구는 초등학교 때 몇 달을 결석했다. 아프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냥 형편이 어려워서 그랬겠지 하고 상상했었는데 이번에 결석한 사유를 실토했다. 친구가 들려준 얘기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장티프스에 걸려 머리가 다 빠지고 힘이 없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죽은 줄 알고 자신을 멍석에 말아 산에 묻으러 가려는데 꿈틀거려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한 할아버지가 쥐를 잡아서 먹였다. 시골에서 구전으로 돌아다니는 대증요법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그게 영양 보충이 됐으리라는 친구의 말이다.
초등학교 때 공부를 잘했지만 중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못된 그 친구는 1년 동안 날마다 십리 길을 걸어 다니며 나무를 하다가 "이대로 내 인생을 시골에서 썩힐 수 없다"고 결심하여 쌀 한 자루를 메고 서울로 향했다.
철공소에서 일하며 고등학교 졸업, 결국 MBA 과정까지 마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