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경평야를 걸으며 정화의 편지를 떠올리다
김영세는 민경평야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뒤로 돌아섰다. 그는 반나절을 걸어 온 풍경을 반대편에서 보고 싶었다. 들판은 지평선까지 이어져 있었고, 그 넓은 들판 위에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웅장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는 축복처럼 쏟아져 내리는 가을 뙤약볕을 받으며 익어가는 벼 이삭들을 어루만졌다.
그는 고개를 들어 보았다. 고목 아래에 그림처럼 원두막이 있었다. 그는 들판 사이를 흐르는 맑은 물소리를 귓등으로 들으며 걸어갔다. 얼마 후 그는 일손을 놓고 휴식을 취하는 농부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노란 구름이 낮게 드리운 것 같은 가을 들판을 하염없이 걸었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정화의 편지 구절을 떠올리며 걸어 나갔다.
임시정부, 장사에서 광주로, 광주에서 다시...
양자강을 따라 서쪽으로 진격해 오던 일본군은 마침내 우리가 있는 장사 지척에 이르렀습니다. 급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임시정부는 장사를 빠져 나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청년 10여 명을 남기고 100여 명의 임정 가족은 광주로 가는 기차에 올랐습니다.
사실 남은 청년들이야말로 우리보다 순수한 애국자들입니다. 그들 중에 김철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장사에 있던 몇 달 동안 한국 어린이들을 모아서 국어와 국사 그리고 노래와 춤까지 가르쳤습니다. 그는 일본군과 맞서 싸우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광주로 떠나는 우리를 전송하면서 자기는 일본군과 직접 싸우기 위해 한구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당시 한구에는 김원봉이 지휘하는 조선의용대가 있었습니다. 조선의용대는 대일전에 나서기 위한 무장부대였습니다. 김철은 나중에 일본 경찰에게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지 1년이 지나도록 임정은 아직 무장군을 조직하지 못했습니다. 중국 정부가 한국 무장군에게까지 협조할 여력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튼 가까이 있던 훌륭한 청년들이 사지(死地)를 향해 기꺼이 달려가는 모습은 감동적이면서도 쓸쓸했습니다.
백범은 장사에서 단신으로 미리 떠났습니다. 광주까지는 사흘이 걸리는 기차 여행이었습니다. 찌는 듯한 무더위에 100여 명의 인원이 좁은 열차 안에서 견뎌야 하는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피난 가는 임시정부의 모습은 실로 참담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우리는 광주에서 다시 뭉쳤습니다. 임시정부가 자리 잡은 곳은 광주시 동산구입니다. 중국 정부는 중경 천도를 계획하고 있다고 합니다. 임시정부는 광주시에 연락처만 남기고 대부분의 식구들은 광주 교외에 있는 불산으로 옮겨갔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공식적으로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무래도 불산에서는 오래 있을 것 같아 집을 한 채 전세 냈습니다. 그 집에 임정 사무실을 만들었고 가족이 없는 국무위원들과 우리 가족이 입주해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일본군은 10월 초에 광동성에 상륙하면서 광동성 전역에 걸쳐 대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제 상황이 오히려 장사보다도 더 위험하고 급박해졌습니다.
일본군은 무섭게 쳐 올라왔습니다. 광동 상륙 불과 열흘만에 일본군은 불산으로 밀어닥쳤습니다. 시민들은 도시를 빠져 나가느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습니다. 임정은 모든 가족을 불산역 구내에 모이라고 통고했습니다. 임정은 중국 정부로부터 객차 한 간을 배정받았으나, 아직 위수사령부로부터 여행 허가증을 얻어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국무위원들과 함께 앉아 허가증을 받으러 간 엄항섭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본군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이 시시각각으로 들려왔습니다. 일행은 술렁거리고 있었습니다. 허가증이 없더라도 불산역으로 가야 한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저는 외람되지만 나서기로 했습니다. 지금 일행이 이곳을 뜨면 나중에 엄항섭이 와서 얼마나 막막할 것인지를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지요.”
밤이 되어서야 엄항섭이 허가증을 들고 헐레벌떡 나타났습니다. 그는 피난민들로 교통이 막혀 늦었다고 하며 미안하다고 사과했습니다. 사실 엄항섭이야말로 공헌자입니다. 저는 그에게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갑자기 왜 이래? 쑥스럽게.”
역은 피난민들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일본군의 기관총 소리가 가까이서 들렸습니다. 모두가 기차를 타려고 아우성이었는데 객차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허가증 없이는 어림도 없었을 뻔했습니다. 우리를 도와준 중국인은 장개석의 측근 오철성 광주시장이었습니다. 그는 중국인들을 다 태우지 못하면서도 한국의 임정 가족들에게 우선 탑승의 혜택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기차는 새벽에 출발했습니다. 동이 터올 무렵 기차가 다다른 곳은 삼수라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바깥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일본 비행기의 공습이었습니다. 기차는 멈춰 섰습니다. 군인의 고함이 들려왔습니다.
“모두 내려 길가로 몸을 피하시오.”
우리는 사탕수수밭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일행에는 여자와 어린이도 적지 않았습니다. 날카로운 비명과 울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습니다.
“침착해야 된다.”
국무위원 중 누군가가 큰 소리로 호통을 쳤습니다.
제 남편을 비롯한 청장년들이 나서 여자와 어린이들을 밭 속으로 이끌었습니다. 요란한 총성이 계속 고막을 때렸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바닥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10여 분쯤 지나자 총성이 산발적으로 바뀌더니 사방이 고요해졌습니다.
선생님, 우리들은 적과 맞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쫓겨 다니기에 급급합니다. 부끄럽습니다. 제가 이만큼 부끄러운데 남자 분들은 그 심정이 얼마나 처참할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대륙을 덮쳐 오고 있습니다. 중일전쟁을 기다려 왔던 우리의 기대는 무참히 깨져 버리고 있습니다. 아, 금방 비라도 쏟아질 듯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며칠 후 김영세는 푸른빛과 따뜻한 햇볕이 무한정으로 배어 있는 남해를 보고 있었다. 그는 호수보다 잔잔한 파란 바닷물 사이에 옹기종기 떠 있는 섬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상큼하게 불어오는 갯바람을 맞으며 오랫동안 서 있기만 했다. 그의 표정에는 비감의 빛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었다.
얼마 후 김영세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등고선을 그려 놓은 듯한 논둑을 올려다보았다. 가파른 경사지에 논배미가 켜켜이 휘돌아 쳐있었다. 까마득히 높은 논 위에서 소 한 마리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자잘한 돌로 쌓아 놓은 어른 키 높이의 석축을 묘한 것인 양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그는 신발 하나를 겨우 놓을 듯싶은 좁은 논길로 들어섰다. 파종한 마늘을 손질하는 농부를 그는 유심히 바라보았다. 농부는 쉬지 않고 흙 묻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석축 아래에 노란 꽃망울을 매달고 있는 해국(海菊)에 눈길을 주었다. 해국 사이로 남해의 푸른 물이 보였다. 그는 고개를 올려 바다를 다시 보았다. 바다에는 고기잡이배 두어 척이 평화롭기 그지없이 떠 있었다.
임시정부, 광주에서 유주로
임시정부는 광서성 서부에 있는 유주를 향했습니다. 그곳에 가려면 주강(珠江)을 따라 수로를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주강은 양자강, 황하, 흑룡강과 함께 중국의 4대 장강입니다. 주강 변으로 육로가 있기는 하지만 포장이 안 된 험한 산길이라서 수로가 훨씬 빠르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대형 목선 하나를 세냈습니다. 목선에는 백 명이 넘는 식구가 생활할 수 있는 편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강물을 떠 올려 몸을 씻을 수도 있는 간이 목욕탕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강을 따라 동북쪽으로 나흘 동안 이동했습니다. 그러자 광서성의 초입에 있는 오주에 도착했습니다. 광주에서 따로 떠난 사람들을 오주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주 도착 후 이틀째 되는 날 그들과 합류했습니다. 인원이 더 늘어났습니다. 이제 목선 하나만으로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올라갈수록 강의 물살이 거세어서 목선의 마력으로는 더 이상 오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윤선 하나를 더 세 내어 그 윤선으로 목선을 끌도록 했습니다.
상류 쪽으로 갈수록 거세진 역류가 배를 요동치도록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배 멀미를 앓기 시작했습니다. 윤선이 아니었다면 목선만으로는 한 발짝도 앞으로 가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들을 하고 있을 때, 윤선은 밧줄을 풀고 빠른 속도로 도망쳐 버렸습니다.
중국의 윤선은 선금을 달라고 해서 주었는데 돈을 다 받은 중국인 선주는 다른 돈벌이를 위해 우리를 팽개쳤던 것입니다. 우리가 발이 묶인 지역은 계평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윤선을 구하기까지 계평에서 여러 날을 하릴없이 기다려야 했습니다.
주강은 운남성에서 흘러오는 우강과 베트남에서 내려오는 좌강 그리고 귀주성으로 통하는 금강과 합류합니다. 우리는 금강을 타야 했습니다. 우리는 금강을 거슬러 오르다가 석룡이란 곳에서 금강의 또 다른 지류인 용강으로 접어든 다음 계속 북으로 올라갔습니다.
용강은 이름처럼 용이 사는 것도 아니었는데 물살이 무섭게 빨랐습니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여울을 만났습니다. 그때마다 배는 휘우뚱거렸습니다. 강폭이 좁아져 이제 윤선도 더 이상 목선을 끌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직접 끌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청년 10여 명이 배에서 내려 밧줄을 묶고 강변을 따라 오르며 배를 끌었습니다. 그들은 시간 교대를 하며 죽을힘을 다했지만 고작해야 하루 이십 리 정도를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청년들은 즐겁게 노래를 부르거나 고함을 치면서 밧줄을 당겼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한 달 보름만에 유주에 닿았습니다.(계속)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해 보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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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과 인간] 임시정부 간판을 달랑 목선에 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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