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언덕배기 집대문을 열고 내다보면 시내가 훤히 보이는 언덕배기 집. 이곳에 머물면 얼마나 좋을까 싶으면서도, 지금 있는 꾀죄죄한(?) 우리 동네도 잘 지키고 싶습니다.
최종규
지난 한 주, 부산 나들이를 하다가, 얼마 앞서까지 제 고향 인천에서 이웃으로 살던 아주머니를 부산 골목길에서 우연하게 만났습니다. 꼭 한 달 앞서 부산으로 살림집을 옮기셨다는 아주머니는, ‘인천처럼 온갖 곳을 개발해서 뒤집어엎어 사람이 살 수 없는 데에서 지역운동 한다고 해 봐야 될 수 없고, 부산(에 당신이 깃든 동네)처럼 개발바람이 불지 않아서 오래오래 뿌리내리며 살아갈 수 있는 데에서 지역운동을 해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언덕배기에 자리잡은 당신 집이 얼마나 살기 좋으냐고, 아침에 하늘 보고 저녁에 별 보며 하루하루 즐겁다고 이야기합니다.
아주머니를 따라 언덕배기 집에 찾아가 봅니다. 문을 열어 놓으면 시원한 바람과 파란 하늘이 한눈에 잡힐 듯 들어옵니다. 아마 이 언덕배기에 깃든 어느 집이건 이런 좋은 모습을 즐길 수 있으리라 봅니다. 시원한 바람을 쐬면서 저녁 대접을 받고 아침 대접을 받다가 생각합니다. ‘우리 동네가 끝내 인천시장이 밀어붙이는 개발정책에 따라서 사라지게 되면, 우리 살림집을 부산 언덕배기 골목집으로 옮길까?’ 하고.
.. 섬 밖으로 나간 사람들 중 대부분은 낯선 타향에서 먹고살기 위해 출신 지역별로 집단을 이루어 생활하면서 밑바닥 노동에 종사하였다. 타향에서 한데 모여살며 삼선(三線)을 퉁기면서 향수를 달래던 사람들의 모습이, 오끼나와 역사와 문화를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는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얘기를 나누는 이민족 집단으로 비치기도 하였다. 그 때문에 일종의 민족차별 같은 감정을 드러내는 일도 종종 있었다 .. (58쪽)무궁화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습니다. 부산에서 인천으로 돌아올 때에도 무궁화 열차를 탔습니다. 웬만하면 주말에 타고 싶지 않았으나, 돌아올 때에는 집에서 기다리는 아기와 옆지기 때문에 서두르느라 토요일 차편을 끊었습니다. 갈 때에는 온통 빈자리라 널널했으나, 올 때에는 밀양부터 선자리까지 꽉 차서 뒷간 갈 틈을 만들기조차 어려웠습니다.
제 옆에 앉은 젊은 분은 손전화로 수없이 누군가와 전화하면서 ‘내 모르고 탔다 아이가, 무궁화 이거 억수로 괴롭네. 다시는 안 탄다’하는 말을 되풀이합니다. 케이티엑스면 세 시간 반이면 될 길을 무궁화로 다섯 시간 반이나 달리니 얼마나 좀이 쑤셨을까 싶군요. 참 안됐습니다.
우리 나라 어디가 안 그러겠느냐만, 전국 어디에 있든 ‘서울로 가는 차’는 아주 많습니다. 네 해 가까이 지낸 충북 충주 산골짜기에서도,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는 삼십 분이나 한 시간에 한 대씩 있었는데(면에 따라 달라서), 이웃 면으로 가는 시골버스는 서너 시간에 한 대 겨우 있거나 하루에 두 대 있기 일쑤였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전국 나들이를 할 때에 시골 버스역에 들러 보면, 어느 시골 면이나 읍에 가든, 적어도 한 시간에 한 대 꼴로 ‘서울 가는 차’는 있는데, 이웃마을로 가는 버스는 짧아도 두어 시간에 한 대 있으면 잘 있는 셈이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인천에서도 바로 이웃해 있는 부천이나 수원이나 안산이나 안양이나 과천이나 광명이나 고양이나 파주나 강화 가는 버스는 좀처럼 잡아타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서울 가는 버스는 많습니다. 그리고 빠릅니다. 값도 눅습니다. 수인선 협궤열차는 끊어지고 나서 다시 뚫릴 낌새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인천과 서울을 급행으로 달리는 복복선은 금세 뚫립니다. 수원에서 서울 가는 차편과 수원에서 인천 오는 차편을 견주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인에서 서울 가는 차편과 용인에서 인천 오는 차편을 대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로지 서울로만, 무엇이든 서울로만, 그예 서울로만 몰리도록 합니다. 중앙일간지라는 신문에서 다루는 기사는 서울에서 일어나는 일을 중심으로 짜고, 지역일간지조차 지역 기사를 제대로 다루지 못합니다. 서울에 매일 뿐 아니라 서울에 죽고사는 우리 나라라고 할까요. 서울이 살면 나라가 살고, 서울이 죽으면 나라가 죽는다고 여긴달까요. 지역주의가 아닌 고향사랑을 하고 싶고, 지역 이기주의가 아닌 내 마을 사랑을 하고 싶은데, 세상 흐름은 고향이건 아니건 오로지 서울을 닮아서 돈을 많이 벌면 그만인 듯 여깁니다. 서울을 따라가야 하는 듯 생각하고, 서울 흐름을 좇으려고 합니다.
.. 만약 이때 오끼나와를 희생시켜 본토 결전을 모면한 역사와 오끼나와를 미군기지 아래에 내버려두고 독립한 역사를 돌이켜봄으로써, 오끼나와 복귀운동에 부응한 전국민적 반환운동이 일어났더라면, 패전 후 일본의 양상은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미국의 군사정책에 협력하여 경제번영을 추구하는 길이 아니라, 좀 가난하더라도 인근 아시아 여러 지역 민중과 연대하여 평화를 추구하는 다른 길을 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 (84쪽)서울에 있는 대학교는 서울에 있는 대학교일 뿐입니다. 서울에 있는 회사는 서울에 있는 회사일 뿐입니다. 학교나 일터를 서울에 두고 있다고 하여 더 훌륭하거나 높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내 고향 인천만 생각해 보아도, 이곳 인천이라는 데가 도시가 된 까닭은 서울로 물자를 올려보내는 ‘공급 공장지대 도시’로 삼으려는 셈속 때문이었고, 서울에서 밑바닥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값싼 잠자리를 얻어서 지내는 구실을 하는 데 있었던 터라, 인천이라는 곳 스스로 우뚝 설 기틀이 없었습니다. 서울바라기를 하지 않고서는 인천이라는 데가 설 수 없도록 모든 얼거리가 짜여 있습니다. 이런 판이니 시에서는 자꾸만 개발사업을 일으켜 아파트 재개발을 하여 세금을 늘리려 합니다. 그러나 갑작스레 쏟아지는 아파트 공급이 제대로 팔리겠습니까. 아시안 경기를 치른다고 골목집을 다 없애고 높직한 빌딩을 새로 올려세워야 21세기 도시다운 모습이 될는지요.
참 까마득하구나 싶으면서도, 참 살기 팍팍하구나 싶으면서도, 섣불리 부산이든 옥천이든 제주든 남원이든 옮길 마음을 품지 못합니다. 아직까지 부산 보수동 언덕배기 골목에는 재개발바람이 안 불어서, 참말 동네 어디에도 부동산 집이 없기는 합니다만, 어느 날 뚝딱뚝딱 바뀔지는 어느 누구도 모를 일이거든요. 사람 사는 즐거움이 아니라 돈 많이 버는 재미에 푹 빠져 버린 이 나라에서 어디를 가든 지금 있는 데하고 크게 다를 바 없다고 느끼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