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산은 지리산의 마지막 자락이다. 그러나 백두대간의 큰 줄기를 타고나서인지 그 위용은 어느 산 못지않게 당당하다. 지척의 거리에 섬진강이 짝을 이뤄 백운산의 한 틀을 앉고 있다.
마주하는 지리산보다 약초가 많아 예부터 약초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 그래서인지 백운산을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더덕 냄새가 오르려는 마음의 발길을 쉬엄쉬엄 멈추게 한다.
가을이라고 하지만 아직은 한낮의 더위가 쉽게 물러갈 태세가 아니다. 땀방울이 성글성글 얼굴에서 떨어질 무렴 작은 등성이가 발길을 서두르게 한다.
억불봉과 백운산 정상을 나누는 푯말이 눈앞에 들어온다. 포스코(주) 수련회관에서 출발한지 1시간. 종종 걸음으로 걸어가면 40분이면 충분하다고 일행이 재촉한다. 오르는 산행 잡목들로 우거진 그늘숲이 많아서 가족단위의 등산객들이 많다.
대여섯 살로 보이는 꼬마가 뒤를 따르고 엄마는 아빠 등에 업혀서 부끄러워 어찌할지 몰라 한다. 장난삼아 꼬마에게 ‘좋은 추억이니 절대로 잊지 말라’고 이야기하자 엄마는 또다시 고개 숙이며 얼굴을 감춘다. 아마 발을 삐어서 일거라고 생각은 들었지만 남편이 대단해 보였다. 만일 나라면...
억불봉과 천왕봉 사이의 갈림길에 서자 억새풀이 작은 바람에도 흐느적거리며 가을을 부른다. 장흥 천관산의 억새풀보다 넓지는 않았지만, 등산로 주변을 감싸고 있는 억새풀밭은 한가함이 주는 나름의 멋에 취하게 한다.
천왕봉 정상을 향한 한적한 길목에 송유선이라고 쓰인 한편의 시가 목판에 쓰여 눈길을 멈추게 한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 보였지만 다듬어지지 않는 그대로의 모습이 산행 길에 알 수 없는 기쁨을 준다.
오던 길을 따라 다시 내려가기로 하고 잠시 소나무 밑에서 배낭을 풀고 억불봉의 기세에 묘한 도발감을 느낀다. 높지 않는 곳이라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억불봉 정상은 백운산을 여러 번 와봤다는 친구조차도 올라본 적이 없다고 했다. 다만 정상 바로 건너편에 우뚝 솟아있는 바위에서 정상의 호연함을 감상했을 뿐이라고 했다.
억불봉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그리 험난하지는 않다. 중간 중간에 철 계단이 놓여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등산로는 초등학생이 걷기에도 어려움이 없다. 마지막 철 계단을 오르자 넓은 바위가 마당처럼 포근하다. 저 건너편이 정상이라 한다. 그리고 여기서 멈추자고 한마디 더 한다.
섬진강의 푸른 물길이 한 눈에 들어오고 멀리 여수 국가 산업단지의 희미한 연기들이 맑은 가을 하늘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지리산은 그 웅장함을 드러내며 백운산을 지키려는 걸까? 한참동안 주변의 경치에 매료되어 자리를 뜬다는 것이 미안해 보인다.
하산 길은 노랭이봉으로 잡았다. 억불봉과 지척의 거리인 노랭이봉은 석양이 아름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누군가가 하나둘씩 쌓아놓은 돌탑은 제법 커다란 모습을 갖추고 등산객을 쉬어가게 한다.
정오쯤에 시작한 백운산 등반길. 모든 봉우리를 오르겠다는 욕심을 갖지 않고 출발해서인지 하산 길의 여유는 오늘 하루를 감사하게 한다. 내려오는 길목에 하나둘씩 가을 단풍이 눈길을 사로잡지만 워낙 가뭄이 심해서인지 단풍색이 곱지는 않다. 그것마저도 시리도록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내가 가진 것을 버리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그런 것처럼. 스님은 버리기 위해 산에 오르고 보살은 얻기 위해 산에 오른다고.
2008.10.04 15:39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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