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인간] '프로페셔널' 독립운동가 이재유

[김갑수 식민지역사팩션 128] 3부 '열두개의 눈동자'

등록 2008.10.05 12:10수정 2008.10.07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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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임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비애감이

어느 날인가는 밤사이 수십 번의 대포 소리가 실제로 북쪽에서 들려오기도 했다. 어린 장준하는 그것을 독립군의 대포 소리라고 단정해 버렸다. 소년은 언덕에 서서 먼 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압록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독립군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오랫동안 생각했다. 이후로 그에게는 이따금 창공을 치어다보는 습관이 생겨났다.

물론 어른들이라고 해서 독립군이 되는 방법을 제대로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독립운동에 앞서 최소한의 공부는 해 놓아야 한다고 말한 바 있었다. 그리고 "너는 독립운동보다는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소년 장준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님, 독립운동이건 목회자건 제가 밭일만 해서는 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아버님 뜻대로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학교에 다니고 싶습니다."

소년 장준하에게 더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은 그의 조부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마을에서 유일한 신문 구독자였다. 벽촌에까지 신문이 매일 배달될 수는 없었다. 신문은 일주일 치가 한 번에 뭉치로 배달되었다.

"왜가 만주에 꼭두각시 나라를 세워 거기에 집정관으로 앉혔던 선통제를 이번에는 아예 황제로 올려 주었더구나. 황제면 뭘 해? 머리 위에 왜군 사령관이 있는데."

이듬 해 봄 장준하는 대관국민학교에 5학년으로 편입학했다. 비교적 늦은 취학이었다.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국민학교를 마쳤다. 이어서 그는 아버지가 교사로 있는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1학년을 마친 후 선천 신성중학으로 전학해야 했다. 아버지가 신성중학교로 전근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신성중학교에서 성경 교사 겸 교목 일을 맡았다. 물론 정식 안수를 받은 목사는 아니었다. 신성중학교를 마친 장준하는 평양 숭실전문에 진학하려 했지만 학교가 문을 닫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숭실전문은 신사참배나 폐교 중 양자택일을 하라는 총독부의 강요를 받고 폐교를 분연히 선택한 뼈대 있는 명문교였다.

아들을 신학교에 보내 목회자를 만들고 싶어 했던 아버지는 아들에게 서울 유학을 시키려 하지 않았다. 기독교인으로서 학교를 선택한다면 연희전문뿐이었는데, 연희전문은 총독부의 강요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장준하는 20세의 나이에 일단 신안소학교 교원이 된 것이었다.


이화여전 전도합창단은 시골 청년 장준하에게 매우 아름답고 세련된 모습으로 비쳤다. 30명 정도로 구성된 합창단은 밝은 초록색 깃을 두른 검은 벨벳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찬송가와 흑인 영가를 불렀다. 그들은 영어 노래도 합창했다.

'아이 위시 유어 메리 크리스마스' 정도는 장준하도 알아들을 수 있는 가사였다. 합창단은 '햇빛보다 더 밝은 곳 여기 있네' 라는 영가를 불렀으며 마지막으로 '가나안 복지 귀한 성'이라는 성가를 불렀다.

 나 가나안 복지 귀한 성에 들어가려고/ 무거운 짐을 벗어 버렸네./ 나 홀로 다시 방황할 리 전혀 없으니/ 내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여기까지 합창으로 부른 후 한 여학생이 독창을 했다.

 길이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 내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길이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 내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장준하는 솔로로 부르는 여학생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녀는 작은 얼굴에 가냘픈 몸매였으며, 다소 검은 피부에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장준하는 주보를 통해 솔로 가창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그녀의 이름은 김수임이었다.

하지만 장준하는, 노래하는 그녀의 음성과 모습에서 알 수 없는 슬픔 같은 것을 느꼈다. 젊고 예쁘며 명문 대학에 다니는 신앙인의 얼굴이 왠지 모를 비애감이 배어 있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김수임에 대한 장준하의 느낌과 관심은 그것 이상일 수는 없었다. 따라서 두 사람 사이에 장차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김수임의 슬픈 사연을 아는 사람은 장준하가 아니라 임주호였다. 임주호는 소년 시절에  남편에게 얻어맞고 길바닥에서 신음하고 있는 김수임을 본 적이 있었다. 임주호는 치마가 찢겨지고 눈자위에 피멍이 든 김수임을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시켜 준 일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김수임과 임주호는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것이었다. 언제나 김수임은 동네 사람들에게 연민의 대상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예쁘고 똑똑해 보이는 한 소녀의 불운을 애석해 하는 말들을 하고는 했다.

소년 임주호는 사람이 돈에 팔려 결혼을 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김수임이라는 소녀를 구해 주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그녀가 마을에서 도망쳤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이따금씩 임주호는 김수임의 소식을 궁금해 했지만, 세월이 흐르며 그는 그녀의 기억을 차츰 뇌리에서 지우게 되었다.

경성트로이카의 불꽃, 이재유

만약 장준하에게 존경하는 두 사람을 말하라고 한다면 김좌진이나 김구가 될 수 있듯이, 이강국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아마도 그는 이재유나 박헌영을 들었을 것이었다. 이강국은 이재유가 체포되었다는 <경성일보>의 기사를 읽고 있었다. 어용지 경성일보는 이재유의 체포 소식을 1937년 4월 30일 자 호외와 톱기사로 전하고 있었다.

집요 흉악 조선 공산당 마침내 괴멸/ 추격 개시 이래 4년, 원흉 이재유 체포

이재유(1905~1944)는 일제 중기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실제적으로 이끈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불꽃처럼 살다 간 신토불이의 독립운동가였다. 이미 1933년 가을 고무공장· 인쇄공장· 방직공장 등 8개 공장의 연쇄 파업을 주도하여 식민지 조선을 뒤흔들었던 그는 민족의 독립 방법론을 사회주의에서 모색한 운동가였다. 그러나 그는 소련이나 중국 공산당 등의 외세와 연계하지 않고 철저히 국내에서 활약했다. 그는 이념보다는 민족의 생존권과 독립을 당면 과제로 삼았다.

삼수갑산의 소년 이재유는 사회운동을 하다 총살되어 버려진 주검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는 17세에 서울로 가서 보성고보를 다니다 개인 사정으로 자퇴한다. 이후 그는 개성 송도고보에 다니다가 종교 교육에 항의하는 동맹 휴교 주동으로 퇴학 처분을 받는다.

일본 동경 니혼대로 유학 간 그는 그곳에서도 사회주의 운동으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됨으로써, 어느 학교 하나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하는 특이한 학력을 쌓게 되었다. 그는 사설 노동학교에 등록하여 사회과학을 연구하면서 사회주의 투쟁 방법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전국무산자평의회에 가입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일제의 문화정치 이후 부쩍 강화된 탄압으로 움츠러든 국내 독립 운동권에서 뚜렷한 역량을 나타내는 지도자로 부상하게 된다. 그는 70여 차례나 현행법을 어기며 맹렬한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3년 6개월의 형기를 치르게 된다. 그러나 출옥 후 그의 활동은 한층 치열해진다. 그는 훗날 남부군 빨치산 대장이 된 이현상, 남로당 총책 김삼룡 등과 더불어 당시 인구에 회자되었던‘경성 트로이카’를 이끌었다.

트로이카라는 러시아 어휘가 시사하듯이, 그는 조직원들을 지도· 감독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원들과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을 지원하는 투쟁 방식을 실천했다. 그는 방대한 조직을 지하에 구축했다. 경성 트로이카 1차 검거 때 체포된 인원이 200명에 달했을 정도였다.

그에게는 당장 이끌어야 할 파업 투쟁이 언제나 급선무였다. 식민지의 본산인 경성에서 활약했던 그는 언제라도 연행, 투옥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는 국외 연결이나 이념 정립 등을 중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소련의 코민테른을 배경으로 위세를 부리는 외국산 공산주의자들을 신랄히 비판하기도 했다. 요컨대 그는 시종일관 현장을 중시한 토착적인 사회주의자였다.

식민지 세월을 통틀어 일본 경찰이 가장 체포하고 싶어 한 인물이 바로 이재유였다. 일경은 이재유를 왜 체포하지 못하느냐는 상부의 질책에 '우리도 눈물겨운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고 답변한 기록을 남겼을 정도이다.

제국주의 경찰이 이재유를 체포하려고 안달한 것은, 그에게 번번이 농락당한 묵은 원한 때문이기도 했다. 이재유는 1934년 1월, 동지 이순금의 집에 들렀다가 체포되지만 용변을 본다고 하고 화장실에 가서 창문을 뜯어내 도주했다.

며칠 뒤 또 붙잡혀 서대문 경찰서로 들어간 이재유는 간수의 감시 소홀을 틈타 미국 영사관으로 도망쳤다가 또 붙잡혔다. 일본 경찰은 그의 손과 발에 수갑과 차꼬를 채우고 그의 허리에는 방울을 달았다.

그는 밥알을 짓이겨 족쇄에 넣었다 빼내 모양을 본뜬 뒤 우유통 뚜껑으로 열쇠를 만들어 족쇄를 풀었다. 그는 저녁밥을 남겨 이질 환자에게 주고 그 환자가 소동을 벌이는 사이에 유유히 경찰서 정문을 빠져 나갔다.

그는 경성트로이카의 협력자이자 이강국의 지도교수였던 미야케의 관사로 은신했다. 그는 다다미 밑에 공간을 만들어 38일 동안 숨어 지냈다. 그가 숨어 있는 동안 미야케 교수가 연행되어 집을 비우게 되자, 배가 고파진 그는 미야케의 집을 나와 경기도 양평에 가서 이관술과 함께 농부 또는 수재민으로 위장하여 활동을 재개한다.

결국 이재유는 1936년 크리스마스에 경기도 경찰부 다나카 고등부장을 필두로 일본 경찰 32명에 의해 최종 체포된다. 그들은 이재유를 체포하기 위해 농부, 학생. 노동자, 장돌뱅이 등으로 위장하여 한 달 남짓이나 잠복해야 했다.

그로부터 8년 후인 1944년 가을, 어떤 30대 여인이 다 죽어가는 불혹의 남자를 등에 업고 청주보호교도소의 철문을 나선다. 결핵과 각기병으로 이미 사망 선고를 받은 그 사나이는 자유로운 세상의 공기가 너무 쇄락했던지 제대로 숨조차 고르지 못했다. 그는 여인의 손을 한 번 잡아 보더니 턱을 비스듬히 젖히고 말았다. 죽은 사나이는 이재유였고, 그를 임종한 여인은 옛 연인이자 동지였던 이금순이었다.

(계속)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해 보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덧붙이는 글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해 보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김수임 #장준하 #경성트로이카 #이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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