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이곳에 방호소를 지어 153명을 주둔시켰고, 수전소를 지어 군인들을 훈련시켰다. 1510년(중종5)에 우도에 왜구들이 자주 침범하자, 장림목사는 왜구에 대비하기 위해 김녕방호소를 구좌읍 하도리로 옮겨 별방진성이라 하였다. 당시 김녕방호소가 있던 자리에, 지금은 김녕경로당이 들어서 있다.
김녕은 조천관과 별방진성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다, 천혜의 조건을 갖춘 포구가 있는 곳이다. 김녕현과 김녕방호소가 없어진 이후에도, 많은 이들이 이 마을을 지나갔다. 그중, 김녕방호소가 별방진성으로 옮겨진지 60여년 후에, 제주에 들어왔던 백호 임제가 김녕을 지나면서 남긴 기록이다.
신선같은 노인들이 근심없이 살던 마을
저물 무렵 김녕포에 도착하여 말을 쉬게 하였다. 이곳은 예날 방호소였는데, 지금은 마을이 생겨 바닷가에 성긴 울타리를 두른 집이 대략 30호였다. 학발에 송형으로 연세가 백세쯤 되는 노인들이 십여 명이나 있었다. 나는 인생이란 매미가 여름 한철밖에 모르는 것과 같은 슬픈 운명인줄 알았는데, 이곳에 와보니 신선의 세계에 들어온 게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어 그 노인들에게 물었다.
“어른신들, 여기서 살면서 무슨 일을 하시며 드시는 음식이 주로 무엇인가요?”
그들 중 지팡이를 짚고 있던 한 노인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우리네들은 군적에 편입되기도 하였고 고기 잡는 바닷일에 종사하기도 해서, 60세 이전까지는 자주 관가에 부림을 받았었죠. 이제 늙어서 신역이 면제된 후, 비로소 몸이 편안해질 수 있었습니다. 풍년 또는 흉년에 따라 밥이 되건 죽이 되건 먹으며, 해가 뜨고 지는 데 따라 나가서 일하고 들어와 쉬곤 하지요. 일을 일부러 벌이지 않고 욕심도 내지 않으며, 베옷 한 벌과 솜옷 한 벌로 여기서 삼사십년 살아 왔답니다. 산은 멀고 물은 깊어서 산채나 고기도 잘 얻을 수가 없어, 다만 모래와 돌 사이에서 불로초를 캐어 맛난 음식을 대신해 먹을 따름이지요.”
“불로초란 어떤 물건인가요?”
“그 줄기는 등나무처럼 넝쿨이 지는데, 처음 돋아나올 때에는 향기롭고 부드러워 먹을 만합니다. 이 섬 둘레로 어디나 다 나지만, 여기만큼 많이 나는 곳은 없습니다.”
백호가 노인에게서 ‘모래와 돌 사이에서 불로초를 캤다’고 들은 것처럼, 이 마을의 들녘에 나가면 온통 모래와 돌투성이다. ‘불로초가 등나무와 같이 생겼다’고 했는데, 제주에서 등나무처럼 넝쿨 지는 식물 중에서 흔한 것으로는 ‘으름 줄기’나 ‘칡'이 있다. 과거 이 마을 사람들이 많이 먹어서 장수했다고 하니 그 실체가 궁금하기만 했다.
지금도 김녕에는 장수하는 노인들이 많아, 현재 최고령 노인이 102세라고 한다. 김군철 학장님도 고령이 믿기지 않은 정도로 말씀을 잘 하시고, 시민기자 명함의 깨알같이 작은 글씨도 곧잘 읽으셨다. 마을에 장수 노인들이 많은 이유를 물었더니, 김 학장은 ‘이 마을에서 생산된 해조류들이 건강에 좋은데, 그중 톳이 으뜸’이라고 답하셨다. 김녕 톳은 일본 사람들도 다투며 사가려한다는 말씀도 하셨다.
1679년(숙종 5)에 안핵겸순무어사로 명을 받고 제주에 왔던 이증 (李增)은 제주를 점검하는 도중, 김녕 일대를 순시하면서 그 여정을 상세히 기록했다.
영등개(김녕포구 남쪽 백사장), 대포(김녕 한개), 김칭정문(金秤旌門)을 지나 김녕원으로 들어갔다. 조반을 하고, 김녕포(김녕 한개를 지칭하는 듯하다), 심포(김녕 해수욕장 인근 작은 포구), 입산봉수(笠山烽燧), 송포(월정리 솔락개)를지나, 김녕굴에 도착하여 굴속에 들어가 그 형세를 구경했다.
이증은 효자 김칭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효자 향리 김칭은 김녕현 사람이다. 현(김녕현)은 주(제주읍)에서의 거리가 50리 인데, 칭은 역으로 관문에 있다가 그의 어머니가 머리 위에 종기가 나서 기절했다는 것을 듣고는 즉시 갓을 벗고 맨발로 50여리를 나아가매, 때를 넘기지 않으려 한번에 달려 하루 만에 도착하여, 그의 다리를 두 번이나 베어 그 어머니께 씹게 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다시 살아났고, 20여 년을 끝까지 봉양하였다.
김녕에는 비석거리가 있는데, 이곳에는 효자김칭의 비와 더불어 효자 ‘박명복’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박효자비가 나란히 서있다. 또 그 앞에는 제주에서 선정을 베풀었던 지방관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선정비 5기도 세워져 있다.
입산봉과 묘산봉, 마을의 오래된 증인
김녕 마을 가까운 곳에 오름 두 개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 그중 동쪽에 있는 것이 입산봉이고, 서쪽에 있는 것이 묘산봉이다.
어사 이증이 순시했다는 입산봉수는 1439년 입산봉(笠山烽) 정상에 세워졌다가, 갑오경장이 일어난 1894년에 폐지되었다고 한다. 일제시대는 이곳에 출입이 금지되었다가 해방이 되자 사람들이 한두 명씩 이곳에 묘를 쓰기 시작해서, 지금은 오름 전체가 무덤으로 덮여있다. 과거 이 오름은 문장봉이라 하여, 농사를 짓지 못하게 했었다고 전한다.
입산봉 서쪽에는 묘산봉(猫山烽)이 자리 잡고 있다. 오름 이름이 원래는 고살미라고도 하는데, 이름이 묘산봉인 것은 그 형상이 고양이와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묘산봉 남쪽 기슭에는 제주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고려 귀족의 무덤이 2기 남아있다. 무덤의 주인공은 고려장수 김수의 증손자 부부의 묘라고 한다.
김수(金須)는 고려 문신으로 1270년 영암부사를 지냈다. 1270년 삼별초가 진을 치던 진도 용장성이 함락되기 직전, 고려조정은 용장성을 함락당한 삼별초가 탐라로 들어갈 것을 예측하여, 영암부사 김수에게 군사 200을 주며 탐라를 수비하도록 명했다. 조정의 명을 받은 김수는 군사를 이끌고 탐라로 들어가 삼별초의 공격으로부터 탐라를 방어하기 위해 제주섬 둘레에 환해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삼별초는 별장 이문경에게 명하여 김수가 장악하고 있는 탐라를 점령하도록 명했다. 이문경이 제주 비양도 인근 명월포로 상륙하여, 고려군을 상대로 혈전을 치렀다. 고려군은 결국 패배하여 삼별초에게 탐라를 내주었고, 김수는 당시 전투에서 사망했다. 애월읍 유수암리에는 김수의 이름에서 유래한 김수못이 있고, 그 인근에 김수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려식 고분이 있다.
이 무덤은 전형적인 고려식 방형묘인데,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제주도 지방문화제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이묘를 광산김씨 입도조묘라 하여, 그 후손들이 매년 음력 3월 15일 이곳에서 묘제를 지낸다.
한편, 묘산봉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곶자왈지대는 도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활엽수림이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검은오름동굴계와 교차하는 곳이다. 그런데, 2006년 이 일대에 160만평 규모의 ‘묘산봉관광지구’가 지정되어, 개발에 들어갔다. 곶자왈 내에 서식하는 수많은 희귀 동식물들과 이 일대 지하 구석구석에 뻗어있는 용암동굴이 훼손될 위험에 노출되자, 지역 환경단체들이 강하게 저항하기도 했었다.
<계속>
2008.10.10 14:58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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