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는 그리고, '빨갱이'라는 민족적 트라우마를 탄생시켜서 몇몇 되먹잖은 기득권 무리에게 자기네 잇속을 챙기기 위한 변명거리를 만들어주기도 했어요. 권력의 뒤에 서서 아무리 진상을 부려도, 잘못됐다고 입 바른 소리하는 사람은 "저거 빨갱이다"라고 잡아가기만 하면 그만이던 시절이 겨우 20년도 채 지나지 않았거든요. 이걸 쓰면서 생각해 보니 얼마 전에 광우병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를 나갔다가 "이 빨갱이 새끼들 다 잡아 가둬야 돼!"하고 시청역 앞에서 혼자 고래고래 고함지르시던 어르신 한 분이 기억나네요.
한참 전쟁 중에 태어나신 저희 아버지보다 나이가 훨씬 더 들어보이는 분이었거든요. 전쟁을 직접 겪었을 테고, 사람 죽이는 공산당 빨갱이의 무서움을 몸으로 느끼셨을만한 분 입에서 "빨갱이"라는 말이 나오다니요.
저는 사람을 죽인 적도 없고 죽일 생각도 없고, 다만 제가 옳지 못하다고 느낀 점에 대해 잘못됐다고 말한 것뿐인데 빨갱이라니요. 대체 누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으면 빨갱이라는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올 수 있는 걸까요. 한 손에 촛불을 들고, 다른 손에는 핫도그 하나 사 들고 먹으면서 빨갱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하루였어요.
아나… 또 이야기가 옆길로 흘렀어요. 전 그냥, 6·25만 아니었어도 제가 최소한 빨갱이라고 욕을 먹지는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촛불집회랑 6·25의 공통점은, 빨갱이로군요.
어쨌거나 다시는 이 땅에 6·25 같은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가슴 깊은 곳에서 철철 흘러 넘치게 해 주는 전시물들이었어요. 실제 같은 인형들을 보고서 감상에 젖어서는 김미어쪼꼬렛이 어쩌고에 대한 이야기를 주절대는 절 그대로 두면 안 되겠구나 싶었나봐요. 오늘의 모델께서 저기 사진 찍으러 가자고 손을 잡아 끌어요.
한때 열심히 나라 지키던 무기들이 이렇게 퇴역해서는 아이들의 놀이기구가 되어주고 있군요. 코브라 헬기에 서로 타 보려고 다투는 저 아이들이 과연 저 동족상잔의 비극에 대해 과연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저러면서 조금이나마 6·25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그걸로 충분한 게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6·25의 민족사적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 강원도 양구라는 곳으로 군대도 빡세게 다녀온, 스물다섯 살짜리 어린이도 저기 한 명 있군요. 아주 신났네요. 이쯤 되면 기념관 안팎의 전시물들은 얼추 다 둘러보았는데요. 정말 봐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기념관을 두 팔로 감싸안은 듯한 외부의 회랑이라고 생각해요.
순국선열의 이름으로...
뭐냐면, 6·25 이후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이름이 새겨진 곳이에요. 제가 아는 분은 단 한 명도 없지만, 회랑을 천천히 지나면서 비석들을 하나하나 쳐다보면요, 막 저쪽 먼 곳에서 총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 비명소리, 울음소리도 들려오는 것 같아요.
지금은 우리보다 훨씬 못 사는 나라인 필리핀도 우리를 돕기 위해 왔다가 이렇게나 많은 희생자를 냈었군요. 제국주의라고 '양키 고 홈'이라고 그렇게 욕을 했던 존스랑 존슨들의 이름도 있어요. 이들도 자기네 나라에서는 미래를 책임질 귀중한 젊은이들이었을 텐데. 이들에게 한국이란 이름도 들어본 적 없고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철저한 남의 나라였을 텐데. 이런 나라를 위해 귀한 목숨을 희생한 그들을 위해서 제단 같은 게 있으면 초나 향이라도 피워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했어요. 한국전쟁과 관련해서 미국이나 미군에게 투닥거리고 싶은 부분들이 좀 있지만, 우리를 위해 죽어간 존스랑 존슨들의 얼굴을 봐서라도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 가렵니다.
되새깁시다. 잊지 맙시다!
직장에 다니는 대학시절 여자 동기에게 전쟁기념관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했었거든요. 근데, 그 친구는 전쟁기념관이 그저 무서워서 싫기만 하다네요.
글쎄… 같은 사물이라도 사람마다 바라보는 시선이 다를 수 있고, 민주국가이니만치 그런 차이점은 인정해야 하는 게 마땅하긴 하지요.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태어나기 훨씬 전에 있었던 전쟁이란 먼나라 이웃나라이야기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고, 6·25가 언제, 왜 일어났는지 몰라도 먹고사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기도 하지만요. 전 그래도 제 동기가 조금은 다른 생각을 가졌으면 해요.
그분들의 희생 덕택에 우리가 이렇게 가족과 함께 따뜻한 식사를 할 수 있고, 매일 익숙한 이부자리에서 편히 잠들 수 있는 거잖아요. 간지러운 말이 아니고 진짜예요. Freedom is not Free.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누리는 그런 평화를 위해 흘린 피를 되새기는 시간을 한번쯤은 가져야 한다고 봐요.
전쟁 물론 싫죠. 누구도 내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기를 원하지 않아요. 하지만 인류의 역사가 곧 전쟁의 역사이고, 현실이 전쟁 아니겠어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사람은 지금의 젊은 우리잖아요.
희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답니다
게다가 전쟁기념관이 나 자신과는 관계가 없는 곳이라고 넘길만한 곳이 아니거든요. 왜냐면, 전쟁이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니까요. 휴전상태잖아요. 지금도 우리의 형 오빠 동생 선배 후배 남친들께서 2년, 혹은 그 이상 동안 허리가 부러져라 삽질 중이니까요.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선조들은 와 닿지 않을 수 있겠지만, 백번 양보해서 우리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 있는 군바리 아저씨들, 지금보다는 훨씬 잘 대우해 줘야 한다고 봐요.
우리 군바리 청년들이요, 씩씩하게 훈련소로 들어갔다가 첫 휴가 나오면 몰골이 어떻던가요. 얼굴은 시커멓게 타서 피부도 우둘투둘해지고, 짧은 머리는 볼품이 없죠. 문제는 비단 외모뿐만이 아니에요. 어딘가 모르게 어리숙해 보이고, 괜히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면서 눈치를 살피는가 하면, 심지어는 "이벼엉! 김! 계! 동!" "잘 못 들었습니다?"하면서 언어적 혼란을 겪는 모습을 보이기도 해요.
그러는 주제에 하는 말이라고는 중대장이 어떻고, 사수가 어떻고 하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만 주절대죠. 마우스 클릭 몇 번에 못 얻는 정보가 없는 21세기 인터넷 코리아에서 편지에는 왜 그렇게 목 메는지 원…. 대체 군바리들은 왜 그 모양일까요? 왜 그렇긴요. 군바리라 그렇죠. 원래 그런 게 군인이에요.
전쟁을 막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뭐냐면요. 역설적이게도 전쟁준비를 가장 잘 하는거예요. 우리 군대가 없으면 아무리 경제가 튼튼하고 협상 잘 하고 미국이랑 친해 봐야 뭐 하나요? 탱크로 밀어버리면 끝인데. 그럼 또 6·25 터지는 거예요.
우리 땅을 지키기 위해 우리 군바리들, 알람 한번 앵앵거리면 5분 안에 전쟁 준비 싹 다 해서 튀어나와야 해요. 그러려면 평소에 행동 굼뜬 친구는 엉덩이도 좀 까이고, 밥을 빨리 먹어야 되니까 숟가락 놔두고 젓가락으로 반찬 집어먹으면 또 욕 먹고…. 여가라고는 축구랑 소녀시대 말고는 별로 없고…. 이런 식으로 사람이 규격화 되고 몰상식해져가요. 나머지 국민 모두를 위해 2년 정도의 시간들을 그런 식으로 희생하는 거죠.
그런 군인들을 이해하고 감싸 안아야 할 사람들은요? 우리죠. 민간인들이죠. 만날 힘든 훈련 받고 고약한 선임에게 갈굼 당해도 밤에 자기 전에 여자친구 사진 한 장 보면서 바보처럼 히히히 웃는 게 그들이거든요.
그러니 가끔씩 휴가 나온 군인들이 우리 상식으로 이해 못할 짓을 좀 하더라도, 박물관 이름을 ‘전쟁기념관’하면서 어이 없이 짓더라도, ‘오죽 군생활이 힘들면…’ 하고 넘겨줘야 하는 게 우리의 도리가 아닐까 싶네요.
나라를 위해 죽어간 선조들의 목숨만큼이나 값진 게, 오늘의 저 군바리들의 희생이거든요. 아저씨라고 놀리지만 말고 한번쯤은 멋있는 군인 오빠~하고 불러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군요.
마지막으로 묵념묵념!!
후아. 다 써 놓고 보니 이번 편은 별로 정리도 안 되고 정신도 없고 재미도 없네요. 기사 초안을 본 제 동기, 이거 뭐 전쟁기념관 이야기는 별로 없다느니 자기를 생각도 없는 무뇌 악질로 만들어놨다느니 또 한바탕 악다구니예요. 요즘 들어 일주일에 야근을 여섯 번씩 하는 등 회사 일에 치이다 보니 힘들어서 그러는 건가 봐요. 어쩌겠어요. 아직 학생인 제가 이해해줘야지요.
전쟁기념관을 직접 가지는 않더라도요. 순국선열, 군바리 장병, 그리고 제 동기를 위해 묵념 한번씩만 합시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www.prettynim.com, www.slrclub.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8.10.13 10:26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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