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평화통일꾼 박광원 선생을 추모하며

20일 새벽 78세 일기로 별세

등록 2008.10.20 15:53수정 2008.10.20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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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박광원 통일민주협의회 회장

고 박광원 통일민주협의회 회장 ⓒ 윤영전

지구촌에 최장기 분단국에 태어나 오직 민주화와 평화통일운동에 평생을 바친 박광원(朴光源) 선생이 78세를 일기로 순명하시었다. 선생의 생애는 일제 강점기인 1931년에 태어나 조국의 광복은 반쪽이었고 이어 분단에다 6.25전쟁과 독재군사정권 등 격동의 시대였다.

지난 10.4선언 1주년 행사가 선생에게는 마지막 통일운동의 의지를 불태운 순간이었다. 최근 몸이 불편한데도 불구하고 당신의 평생소원인 조국통일을 열망했기에 기꺼이 참석하였다. 평소 희생정신으로 평화통일운동에 참여하시면서 건강을 잃고 운명하시고 말았다.

선생의 출생은 광주지만 전북 순창으로 이거하여 5세에 부친을 잃고 10세 때에 징용에 끌려간 22살의 형마저 잃었다. 일제에 대한 침략행위에 분노하였다. 진정한 애국지사 김구선생에 연설에 매료되어 존경하다 백범을 잃었지만 조국통일의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러나 분단은 고착되고 남북의 각각 정부가 들어서더니 6.25전쟁이 일어나 학도병으로 참전하였다. 생사의 기로에서 전쟁 중에 심장질환으로 참전 1년 만에 병가 제대했다. 제대 후에 인천보육원에서 봉사하면서 주경야독으로 학업을 이어가고 교육에 종사했었다.

선생은 12년 자유당정권이 삼선개헌으로 초대대통령에 한해 영구히 대통령을 하겠다는 무리한 개헌에 실망했다. 이때부터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조국통일의 당위성을 인식했다. 인천이 제2의 고향이 되고 보육원을 창립하여 1990년 중반까지 운영하였다.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의 방북으로 인해 조국에 대한 통일 열정이었고 귀국하여 감옥에 간 문 목사의 조국을 사랑하는 깊은 뜻에 공감하면서 의식이 고취되었다. 1994년 문 목사가 심장마비로 운명하자 통일의 씨앗이 되어 인천과 서울을 오가며 통일운동을 전개했다.

1995년 1월 조국통일에 대한 애국지사요 독립운동가로 반독재투쟁의 원로인 구익균 선생을 비롯한 지도자들과 평화통일 운동에 동참하겠다는 동지들을 규합했다. 인천에서 전국을 대상으로 통일민주협의회를 창립하였고 분단종식을 위한 ‘통일아침대화’장을 마련했다.


그리고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이후 활발해진 민족화해협력위원회 공동대표로 선임되었다. 또한 통일교육협의회 공동의장과 평화통일시민연대 고문과 남북경협살리기 국민운동본부 삼임공동대표를 맡아 평화와 통일로 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특히 2004년 6월 남북이 남쪽에서 처음열린 남북공동행사를 인천체육관에서 개최하여 평화통일의 꿈을 한반도에 깊게 심어주었다. 수차례 금강산을 다녀오고 개성공단을 방문하는가 하면 평양과 백두산에서 열린 남북 간의 화해와 협력 행사에도 언제나 동참하였다.


선생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국이 분단되어 통일을 이루지 못함을 한탄하며 통일조국으로 가는 방안을 염원했다. 평화통일은 8천만 동포의 꿈이다. 통일을 가상하면서 여러 명칭의 이름을 구상하면서 한민족. 조선족 등 다양하나 역사적으로 고려족이라고 생각했다.

필자는 뒤늦게 통일의 광장에서 선생을 만나 형님처럼 대하였다. 나의 맏형도 조국통일 염원하고 여순사건 후유증으로 재판도 없이 죽어갔지만 둘째형이 선생과 같이 6.25전쟁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고 상이제대를 하였다. 그리고 민주화운동과 통일에 관심이었다.

평화통일을 논하는 세미나 또는 토론회에는 항상 박광원 선생과 함께했다. 열정적인 토론과 주장은 반백년이 넘도록 오직 통일에 대한 꿈과 희망의 발로였다. 선생이 지난 군사독재시절에 편 민주통일운동보다 10년 전부터 펴온 통일운동은 약과라고까지 평하였다.

그러기에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갈망은 역사적인 6.15선언과 10.4선언의 착실한 이행이라 했다. 근간 남북관계의 경색에 깊은 우려를 표면하면서 어렵게 얻어진 금강산관광의 재개와 개성공간의 활성화가 남북이 함께 상생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시었다.

선생이 약 한달 전에 약간 몸에 이상을 느꼈지만 평소의 건강 체질과 투지로 별로 우려하지 않으셨다. 보름 전에 통화를 할 때만 해도 충분히 질병을 이겨낼 수 있다고 자신하시었다. 나또한 현대의학의 발달로 기대한다고 말씀드리고 마음의 병을 잊으라고 하였었다.

그런데 지난 10.4일 남북정상선언 행사에 꼭 가야한다며 참석하신 일이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다. 입원하시고 퇴원하신 후 마지막 입원실로 선생을 찾았을 때 기력이 급속도로 쇠잔하시고 말씀도 잊으셨다. 내가 크게 말씀드리니 알았다는 의식만을 보여주시었다.

아직은 할 일이 많은데, 한반도 통일을 꼭 보고 눈을 감겠다는 약속도 미루고 10월20일 새벽 4시에 격동의 한 많은 세상과 영영 이별하시었다. 존경하는 박광원 회장님이 남겨주신 평화와 통일을 저희들이 최선을 다하렵니다. 부디 천상에서 영면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덧붙이는 글 | 평화통일운동가 박광원 회장이 78세로 20일 새벽 인천의료원에서 운명하셨다. 선생은 분단조국에 태어나 평생을 민주화와 평화통일 운동에 매진했다. 마지막 10월 4일 남북정상회담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는 등 선생은 조국과 민족에 헌신했다.

필자는 1995부터 평화통일 운동의 광장에서 만나 (사)평화연대 상임고문으로 함께 일하며 평화와 통일의 상징인 금강산과 개성 등에 함께하였다. 비록 10살이 연상자지만 선생은 청년처럼 언제나 후배들과 함께한 보기드문 통일운동가 원로 선생님이시다.


덧붙이는 글 평화통일운동가 박광원 회장이 78세로 20일 새벽 인천의료원에서 운명하셨다. 선생은 분단조국에 태어나 평생을 민주화와 평화통일 운동에 매진했다. 마지막 10월 4일 남북정상회담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는 등 선생은 조국과 민족에 헌신했다.

필자는 1995부터 평화통일 운동의 광장에서 만나 (사)평화연대 상임고문으로 함께 일하며 평화와 통일의 상징인 금강산과 개성 등에 함께하였다. 비록 10살이 연상자지만 선생은 청년처럼 언제나 후배들과 함께한 보기드문 통일운동가 원로 선생님이시다.
#평화통일 #분단조국 #박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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