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링벅>겉표지
창비
동준은 공부 잘하는 모범생 형을 둔 평범한 아이다. 보통 이런 경우라면 열등감을 느낄 법도 하건만 동준에게 그런 것은 없다.
'형은 형이고 자신은 자신이다'라고 생각하는 동준은 씩씩하다. 엄마와 아빠 몰래 연극부에 들어간 상태며 하고 싶은 걸 위해 자율학습 같은 것을 건너뛰기도 한다. 공부해서 일류 대학에 가야 한다는 엄마의 말도 너스레 떨며 넘길 줄 아는 그런 아이다.
그런 동준에게 문제가 생긴다. 집안의 자랑이었던 형이 죽은 것이다. 더군다나 형은 사고를 당해 죽은 것이 아니었다. 자살한 것이다. 그 사건으로 인해 집안 분위기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된다. 가족의 자살은 남은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래도 동준은 친구들의 도움과 연극부에서 가출한 친구를 대신해 주연급 역할을 맡으면서 서서히 회복하려 한다.
또한 집안 분위기를 살려보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동준의 그런 모습이 조금씩 집안에 퍼지려고 할 때, 동준은 사촌 형을 통해 형이 자살한 이유에 대해 듣게 된다. 일류대를 들어가며 집안의 자랑이 됐던 형이 삶을 부끄러워하던 이유를, 그 같은 일에 엄마가 연관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심한 충격을 받게 된다. 엄마 때문에 형이 죽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동준, 그는 이 시련기를 견딜 수 있을까?
열여덟 청소년의 성장통을 다룬 <스프링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제목의 의미부터 알아야 한다. 아프리카에 사는 스프링벅은 자살하는 양들로 알려져 있다. 무리 전체가 "성난 파도와 같이 산과 들을 넘어 계속 뛰기만 하는"데 쉽게 멈추지 않는다. 앞에 벼랑이 있어도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양들이 떨어져 죽는다. 왜 그런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 양들이 그렇게 죽어간다.
배유안은 이 모습을 우리 청소년들의 삶으로 비유했다.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다. 뒤에서 내몰고 있기 때문에 멈추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앞에 죽음과 같은 것이 있어도 그렇다. 싫어도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뒤에서 몰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학벌주의와 그로 인한 경쟁 등이다.
이것을 안다면 <스프링벅>이 건네려는 말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죽을지도 모르는 곳으로 내몰리는 청소년들의 처지다. 그리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짚어주는 것이다. 뻔한 것 같은가? 누구나 아는 문제 같은가? 맞다. 배유안이 <스프링벅>에서 그려내는 풍경들의 밑그림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법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스프링벅>에서 들려오는 청소년들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아이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일류대에 다니다가 자살한 형이나 가출을 해야 했던 친구, 선생님 때문에 상처받아 울어야 했던 친구들의 목소리가 하나의 바늘이 되어 가슴을 콕콕 찌르는 것 같다.
이미 아는 것임에도 왜 그런 것일까? 많은 어른들이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방치하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래도 내 아이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스프링벅>은 그것을 말하기 위해, 단지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나은 것이 무엇인가를 알리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렇기에 이 소설의 건네는 말은 이미 아는 것임에도, 반갑다.
<스프링벅>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소설이다. 하지만 어른들이 봐도 좋다. 아니, 어쩌면 어른들부터 봐야 할 소설일지도 모른다. 이 책으로 말미암아 아이들을 내모는 그런 것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로 인해 아이들이 좀 더 행복해질지도 모를 테니까 그렇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누군가에게는 꽤 중요한 의미가 될 수 있는 것을 <스프링벅>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스프링벅
배유안 지음,
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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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 사는 '스프링벅'이라는 양 이야기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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