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G_0110월유신을 보도하는 동아일보 (1972년 10월 18일자)
라영수
박정희가 장기집권을 작심하고 개헌을 단행하였고, 얼마 뒤 바로 박정희는 10월유신으로 단말마적인 끝머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4월혁명의 감격이 채 식기도 전에 해방조국의 가장 어두운 시대를 박정희가 열어가고 있었다.
나는 앞길을 선택하여야 하는 심각한 기로에 서있었고, 결혼문제는 뒤로 밀리는 어려운 너무 무거운 문제들로 짓눌려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가득 혼기가 차있었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태에 와있어 최후의 결정을 그 사람의 주임교수에게 맡기기로 한 것이다.
교수실에는 비서학생이 메모지를 보며 말했다. “교수님이 아주 급한 일이 생겨 1시간 이후에 오신다고 연락을 주셨습니다”.
나는 그의 소매를 끌고 나오면서 말했다. “교수님이 줄 수 있는 조언이라면 아마 내가 하는 것과 다름이 없을 거야…. 그도, 이 시대, 이 땅의 남자이니까.”
그리고 교정을 빠져나오며 차중락의 노래를 함께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