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들의 묘.여순사건으로 숨져간 형제가 잠들어 있는 '형제묘'의 묘비. 묘비의 크기가 애기 무덤처럼 작다.
강기희
여순사건의 발단은 1948년 4월 3일 발발한 제주 '4·3항쟁'. 제주에 민중 봉기가 일어나자 정부는 진압을 위해 여수에 있던 14연대를 제주에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당시 14연대 병력들은 무기고를 접수하고 제주 파병에 반기를 들었다.
동족상잔의 비극보다 친일 경찰 단죄 택한 14연대 병사들그들이 제주 파병을 거부하고 반란군이 된 것은 1948년 10월 19일 오전 8시경. 당시 14연대 인사과에 근무하던 지창수 상사를 비롯 정락현, 최철기, 김근배 등 하사관들이 반란의 주동을 맡았다. 이들은 '동족상잔 결사반대'와 '미군 즉시 철퇴' 등의 강령을 두고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정부와 맞섰다.
우리는 조선 인민의 아들들이다. 우리는 노동자와 농민의 아들들이다. 우리의 목적은 외국 제국주의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고 인민의 이익과 권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 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의 호소문 글 <애국국민에게 호소함> 중에서그렇게 촉발된 여순사건의 봉기군들은 여수와 순천, 구례, 보성, 광양 등의 지역을 점령하면서 세를 넓혀 나갔으나, 그해 10월 27일 오후 3시경 진압군이 여수를 장악하면서 역사적인 막을 내렸다.
짧은 해방 공간의 기록. 하지만 우리는 그날의 역사를 '여순반란사건'으로 배웠고, 그 이후 여수와 순천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소식은 어느 역사책에서도 찾아 낼 수 없었다.
피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1948년 10월 27일 진압군이 여수를 장악하면서부터였다. 진압군은 여수 서국민학교를 비롯해 동정공설시장, 동국민학교, 종산국민학교 진남관 등 공터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여수인들 모이게 하고는 여순사건 동조자 색출에 나섰다.
진압군은 여수 시민 모두를 반란군으로 취급했다. 우익이 아니면 고개도 들지 못했던 순간들. 흰 고무신을 싣고 있다는 것도 죄가 되고, 머리가 짧다는 이유만으로 빨갱이가 되어야 했던 극한의 공포.
누군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향해 지목만 해도 즉결처분되는 생과 사의 갈림길. 이른바 '손가락 총'이라 불리는 인간 사냥. 좌익과 우익이라는 이념의 잣대 앞에선 부모자식과 친구 사이라는 인과관계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인간이되 인간일 수가 없었던 끔찍한 학살의 기억.
10월 26일엔 그 학살의 기억을 잊지 못하는 이들과 유적지 답사를 떠났다. 여수 경찰서 인근에 있는 종산국민학교(현 중앙초등학교)는 걸어서 나간 사람이 없을 정도로 죽음의 공간이었다.
당시 부산의 5연대 1대대장이었던 김종원은 일본군 하사관 출신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는 종산국민학교에서 혐의자를 취조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도로 여수 시민의 목을 치기도 했다. 그는 여순사건 이후에도 거창양민학살을 주도하는 등 대표적인 군내 친일 세력이었다.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김종원. 정부는 그에게 양민 학살을 자행한 대가로 을지무공훈장을 비롯해 8개의 훈장을 선물했다. 당뇨병으로 1963년 사망한 그는 1960년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에 까지 연루되었으니 현대사의 비극이 한 둘 아니다. 그런 김종원에게 누군가 '백두산 호랑이'라고 했다니 그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