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ne Banking 선거 마감 시간까지 전화를 돌리며 한 표를 호소하고 있는 자원봉사자들
최현정
우리는 '나가서 투표해(Get Out Vote)' 파가 됐다. '네이트'라는 헤드쿼터는 내 이름과 연락처를 받고는 종이상자에 꽂혀 있는 노란 서류봉투 중에서 한 개를 골라 준다. 차가 있냐고 물어보는 걸 보니 조금 먼 동네를 주는 것 같다. 방문시 주의사항을 꼼꼼히 설명해주던 데보라 할머니는 약간 미안한 얼굴을 하며 "잘 사는 동네라 다리가 좀 아플 거'라는 말을 슬쩍 건넨다.
할머니는 이 동네 토박이답게 주소만 보고도 동네 특징을 척척 집어내며 설명해 주고 있었는데, 우리가 갈 집들의 주소 옆엔 이미 1차 체크가 끝나 있었다. 아침에 다른 자원봉사들이 이미 이 지역을 한번 노크했고 우리는 2차 멤버인 것이다. 그 밑에 3차도 있는 거 보니, 저녁 무렵에 다른 친구들이 한 번 더 도는 듯 하다. 하루 종일 집에 있는 사람들은 세 번 똑같은 '잡상인'의 방문을 받는 셈이니 신경질이 날 수도 있겠다 싶다. 비상번호가 왜 필요한지 알 듯 하다.
더불어, 이런 '저인망'식 투표 독려에 어느 누가 빠져나가랴 싶다. 띵동~~~
"누구세요?" "아 네… 계시네요. 제 이름은 현정이구요. 지금 자원봉사를 하고 있어요. 투표 하셨나요?" "어머, 아까도 누가 다녀가는 것 같던데. 난 아침 일찍 벌써 갔다왔어요. 거의 한 시간은 기다려서 간신히 했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에요. 투표율이 이 정도면 잘될 것 같지 않아요? 난 오늘 아침부터 너무 너무 설레네. 그나저나 고생이 많으시네요~." 따로 말도 안했는데, '버락'이라고 쓰여진 티셔츠를 보고는 오마바 자원봉사자라는 걸 알아챈 첫번째 집 아줌마는 아주 호의적으로 우리를 맞아준다. 시작이 나쁘지 않다.
그렇게 한 30여 분이 지났을까, 꾸물거리던 하늘에서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유권자 주소가 적힌 종이가 젖지 않게 꿀단지마냥 가슴에 꼭 껴안고는 다음 집을 찾아다녀야 했다. 데보라가 부자 동네라 고생 좀 할 거란 얘기가 뭔 말인지 슬슬 실감이 나기 시작한다. 한 집 끝내고 다음 집으로 가려면 운동장만한 잔디밭을 가로질러 나와 다시 운동장만한 길을 걸어 들어가야 대문이 나오는 동네라 이거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공식 휴일이 아닌지라 열심히 걸어 들어가 벨을 눌러도 고요하기만 한 집이 태반이었다. 한 층에 십여 집이 있는 한국의 복도식 아파트가 꽤 인간적이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솔직히, 한두 집 건너뛰고 빨리 나한테 할당된 이 아흔 집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집집마다 문손잡이에 'VOTE OBAMA TODAY'(오늘은 오바마에게 투표하는 날)가 걸려있는 거 보면, 첫 자원봉사 돌았던 친구들의 고생이 보여서 요령을 피울 수도 없었다.
"아이씨 릴렉스~" 영어로 개를 달래다이 곳은 격전지답게 거의 한 집 걸러 하나씩 마당에 오마바 푯말이 꽂혀 있다. 네이트며 데보라며 지하실에서 집집마다 전화 돌리고 있는 자원봉사자들이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짐작이 갔다.
주소록 옆에는 비고란이 있어서 유권자 반응이나 특이사항을 적어놓는데, 어느 집에 비고란엔 'NO! do...' 하며 흘림체로 써놔 뭐라는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잔디밭을 가로질러 문 옆의 벨을 누르는데, 그 때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황소만한 개가 컹컹 짖으며 나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오는 게 아닌가.
그 흘림체 글씨가 "개 조심"이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듯, 이 놈은 내 종아리를 툭툭 치며 으르렁 거리기 시작한다. 개 주인은 아무리 벨을 눌러도 묵묵부답이고 주변에 도움 받을 사람도 안 보이고, 이러다 죽으면 필라델피아 낯선 동네에서 진짜 무슨 개죽음이냐는 생각이 들면서 난 영어로 개를 달래기 시작했다.
"오케이 오케이, 헤이, 존? 오얼 데이빗? 아이 씨~ 아이 씨~ 오케이~ 자, 릴렉스 릴렉스~."이렇게 말하며 꽁지 빠지게 도망가는 내 뒤에서 이 황소만한 놈은 몇 번 더 컹컹 짖더니 더 이상 따라오진 않았다. 간신히 그 너른 잔디밭을 벗어난 나는, 있다 저녁 시간에 세 번째 이 집을 방문할 성명 미상의 자원봉사자를 위해 사인펜을 꺼내 비고란에 크고 굵게 썼다.
'NO! Beware of BIG D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