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를 위해 난 '잡상인'이 됐다

대선 당일, 삼세번 그물로 표 낚은 자원봉사자들

등록 2008.11.07 17:31수정 2009.04.10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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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4일 오전 7시 30분, 맨해튼 32번가에서 탄 트레인은 정확히 14분 후, 나를 뉴저지 호버켄 역에 내려줬다. 처음 가보는 곳이라 어리둥절하며 입구를 빠져 나오는데, 웬 훤하게 잘 생긴 남자가 웃으며 다가온다. 그는 매우 친근한 목소리로 나에게 묻는다. "투표했니?" 그가 건네준 팸플릿엔 둘째 딸 샤샤를 안은 오바마의 활짝 웃는 사진이 박혀 있었는데, 돌아서는 내 뒤통수에다 그는 역시 다정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던진다. 

"우리는 이길거야! 예스, 위 캔"

약속시간을 맞추기 위해 서둘러 골목을 도는데, 이번엔 머리 희끗한 할머니가 다시 내 길을 막더니 투표 여부를 묻는다. 맞은 편 횡단보도에도 두 명, 저쪽 스타벅스 앞에도 서너 명의 젊은이들이 출근길을 재촉하는 이들을 상대로 투표를 독려하고 있었다.  

투표 당일에도 선거 운동을 할 수 있는 여기 선거법으론 이렇게 쪽수 많은 사람이 우세할 수밖에 없다. 역에서 빠져나와 친구와 만난 약 7분 사이 난 정확히 9명의 열혈 오바마 자원봉사자들을 만나 다섯 번의 "투표했냐"는 말을 들어야 했고, 두 손 가득 오마바가 박혀진 '찌라시'들을 얻었다.

7분 사이에 만난 9명의 열혈 오마바 지지자들 
 
 GOV(Get Out Vote: 나가서 투표해) 자원봉사자 데보라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투표를 독려하는 방법을 다른 자원봉사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GOV(Get Out Vote: 나가서 투표해) 자원봉사자 데보라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투표를 독려하는 방법을 다른 자원봉사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최현정

나와 친구는 선거날 필라델피아로 갔다. 미국 헌법이 제정된 곳이라는 상징적인 도시인 이곳은 이번 44대 미국 대선의 향방을 가늠하는 '스윙 스테이츠(Swing States : 정치적 성향이 뚜렷하지 않는 주)' 중 하나다. 힐러리 지지자들과 총기 소유 찬성론자들, 더불어 매케인 측에서 공을 들이고 있는 중립 성향의 유권자들이 많은 동네다. 

몇번 길을 잘못 든 것까지 합쳐 2시간 30분을 달리니 필라델피아 인근 엘킨스파크에 위치한 세인트 폴 교회가 보인다. 주차장엔 차댈 곳이 마땅치 않았는데, 이 동네 주민들은 물론이고 우리 같이 뉴욕, 뉴저지 번호판을 단 차량도 보였다. 중요한 지역에서 SOS를 요청하면 이미 안정권에 접어든 이웃 도시에서 달려와 선거 품앗이를 해주는 형식이다. 

교회 입구는 이미 오전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자원봉사자들과 나가는 이들이 교차되며 시장 통을 방불케 했다. 그 안은 더 소란하고 붐볐는데, 누구네 집에서 떼어온 듯 보이는 낡은 텔레비전에선 아침부터 줄 잇는 투표 행렬과 이 날의 선거 분석을 조심스럽게 내놓고 있었다. 이날 이 센터의 주요 임무는 유권자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선거를 독려하는 일(GOV : Get Out Vote - 나가서 투표해)과 일대일로 전화를 거는 일(Phone Banking)이다. 


선관위는 후보가 요청하면 유권자의 전화번호와 주소 같은 개인 신상명세를 내어줄 의무가 있는데, 그 자료를 바탕으로 전화파와 방문파가 만들어진 것이다. 68세의 데보라 할머니는 직접 그린 도표를 짚어가며 어떻게 집을 찾고 벨을 눌러야 하며 어떤 대답을 끌어내야 하는지 까지 꼼꼼하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비상번호를 적어가라는 말도 잊지 않으면서.

교회 지하로 내려가니 거긴 전화 선전전이 한참이다. 각 자원봉사자들은 자기에게 할당된 100여 명의 선거인단 명단을 들고는 자분자분하게 얼굴도 모르는 유권자와 얘기를 하고 있었다.  


라운드 테이블이나 구석의 책상, 한 켠에 놓인 긴 의자에 아무렇게나 앉아 아침부터 똑같은 소리를 반복하는 아주 힘들고 지루한 작업이다. 그래도 반겨주는 사람들이 있는지 대부분 기분좋게 전화를 끊고는 다음 통화자를 찾고 있다. 물론 안 보이는 상대방에게서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얼굴이 벌개져서 끊는 봉사자도 종종 눈에 띄긴 했지만 말이다. 

'저인망식' 투표 독려, 그 누가 빠져 나가랴

 Phone Banking 선거 마감 시간까지 전화를 돌리며 한 표를 호소하고 있는 자원봉사자들
Phone Banking 선거 마감 시간까지 전화를 돌리며 한 표를 호소하고 있는 자원봉사자들최현정

우리는 '나가서 투표해(Get Out Vote)' 파가 됐다. '네이트'라는 헤드쿼터는 내 이름과 연락처를 받고는 종이상자에 꽂혀 있는 노란 서류봉투 중에서 한 개를 골라 준다. 차가 있냐고 물어보는 걸 보니 조금 먼 동네를 주는 것 같다. 방문시 주의사항을 꼼꼼히 설명해주던 데보라 할머니는 약간 미안한 얼굴을 하며 "잘 사는 동네라 다리가 좀 아플 거'라는 말을 슬쩍 건넨다.

할머니는 이 동네 토박이답게 주소만 보고도 동네 특징을 척척 집어내며 설명해 주고 있었는데, 우리가 갈 집들의 주소 옆엔 이미 1차 체크가 끝나 있었다. 아침에 다른 자원봉사들이 이미 이 지역을 한번 노크했고 우리는 2차 멤버인 것이다. 그 밑에 3차도 있는 거 보니, 저녁 무렵에 다른 친구들이 한 번 더 도는 듯 하다. 하루 종일 집에 있는 사람들은 세 번 똑같은 '잡상인'의 방문을 받는 셈이니 신경질이 날 수도 있겠다 싶다. 비상번호가 왜 필요한지 알 듯 하다. 

더불어, 이런 '저인망'식 투표 독려에 어느 누가 빠져나가랴 싶다.  띵동~~~

"누구세요?"
"아 네… 계시네요.  제 이름은 현정이구요. 지금 자원봉사를 하고 있어요. 투표 하셨나요?"
"어머, 아까도 누가 다녀가는 것 같던데. 난 아침 일찍 벌써 갔다왔어요. 거의 한 시간은 기다려서 간신히 했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에요. 투표율이 이 정도면 잘될 것 같지 않아요? 난 오늘 아침부터 너무 너무 설레네. 그나저나 고생이 많으시네요~."

따로 말도 안했는데, '버락'이라고 쓰여진 티셔츠를 보고는 오마바 자원봉사자라는 걸 알아챈 첫번째 집 아줌마는 아주 호의적으로 우리를 맞아준다. 시작이 나쁘지 않다.

그렇게  한 30여 분이 지났을까, 꾸물거리던 하늘에서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유권자 주소가 적힌 종이가 젖지 않게 꿀단지마냥 가슴에 꼭 껴안고는 다음 집을 찾아다녀야 했다. 데보라가 부자 동네라 고생 좀 할 거란 얘기가 뭔 말인지 슬슬 실감이 나기 시작한다. 한 집 끝내고 다음 집으로 가려면 운동장만한 잔디밭을 가로질러 나와 다시 운동장만한 길을 걸어 들어가야 대문이 나오는 동네라 이거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공식 휴일이 아닌지라 열심히 걸어 들어가 벨을 눌러도 고요하기만 한 집이 태반이었다. 한 층에 십여 집이 있는 한국의 복도식 아파트가 꽤 인간적이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솔직히, 한두 집 건너뛰고 빨리 나한테 할당된 이 아흔 집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집집마다 문손잡이에 'VOTE OBAMA TODAY'(오늘은 오바마에게 투표하는 날)가 걸려있는 거 보면, 첫 자원봉사 돌았던 친구들의 고생이 보여서 요령을 피울 수도 없었다. 

"아이씨 릴렉스~" 영어로 개를 달래다

이 곳은 격전지답게 거의 한 집 걸러 하나씩 마당에 오마바 푯말이 꽂혀 있다. 네이트며 데보라며 지하실에서 집집마다 전화 돌리고 있는 자원봉사자들이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짐작이 갔다.

주소록 옆에는 비고란이 있어서 유권자 반응이나 특이사항을 적어놓는데, 어느 집에 비고란엔 'NO! do...' 하며 흘림체로 써놔 뭐라는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잔디밭을 가로질러 문 옆의 벨을 누르는데, 그 때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황소만한 개가 컹컹 짖으며 나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오는 게 아닌가.

그 흘림체 글씨가 "개 조심"이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듯, 이 놈은 내 종아리를 툭툭 치며 으르렁 거리기 시작한다. 개 주인은 아무리 벨을 눌러도 묵묵부답이고 주변에 도움 받을 사람도 안 보이고, 이러다 죽으면 필라델피아 낯선 동네에서 진짜 무슨 개죽음이냐는 생각이 들면서 난 영어로 개를 달래기 시작했다. 

"오케이 오케이, 헤이, 존? 오얼 데이빗? 아이 씨~ 아이 씨~ 오케이~ 자, 릴렉스 릴렉스~."

이렇게 말하며 꽁지 빠지게 도망가는 내 뒤에서 이 황소만한 놈은 몇 번 더 컹컹 짖더니 더 이상 따라오진 않았다. 간신히 그 너른 잔디밭을 벗어난 나는, 있다 저녁 시간에 세 번째 이 집을 방문할 성명 미상의 자원봉사자를 위해 사인펜을 꺼내 비고란에 크고 굵게 썼다.

'NO! Beware of BIG DOG.'

 선거운동을 하고 녹초가 돼 돌아갔더니 아이들이 준비한 것으로 보이는 쿠키와 샌드위치 등이 마련돼 있었다.
선거운동을 하고 녹초가 돼 돌아갔더니 아이들이 준비한 것으로 보이는 쿠키와 샌드위치 등이 마련돼 있었다. 최현정

그렇게 비에 젖으며 개에 쫓기며 아흔 집을 돌고 나오니 소금에 절인 김장배추 저리가라 싶게 녹초가 되 버렸다. 교회의 TV 속에선 선거가 한창 무르익고 있었고, 세 번째 방문을 위한 GOV팀들은 이미 숙련된 조교 같은 얼굴을 하고는 각자 맡은 동네로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누가 조달해 왔는지 그들 손엔 노란색, 파란색 꼬깃꼬깃한 우비들이 하나씩 들려졌는데, 무엇보다 반가웠던 건 한 상 가득 차려진 케이크와 과자들이었다. 그 옆에서 꼬마들이 연신 빈 그릇을 치우고 음식을 나르는 걸 보니 그건 아이들 담당인 듯 보인다.

걸신들린 사람마냥 샌드위치를 우적대고 있는데, 데니얼 아저씨가 다가와 말을 건다. 그는 1차 이라크 전쟁에서 한쪽 팔을 잃은 상이군인이다. 

"너네들, 뉴욕에서 여기까지 왔다며?"
"(우적우적… 쩝쩝) 응… 그런데?"
"먼 데서 여기까지 왔는데, 숙소는 잡았니? 잘 데 없으면 우리집 지하실 써도 돼.  언제든지 환영이니까 말만 해."

미국이란 삭막한 땅에서 받은 제안이라 순간 약간 감동했다. 하지만 여기 자원봉사센터 안에선 이런 호의쯤은 다반사인 듯 보이는 게, 여기 사람들은 종종 데니얼네 지하실 신세를 지고 있다고 한다. 

 오마마 지지를 호소하기 위해 나선 오누이
오마마 지지를 호소하기 위해 나선 오누이 최현정

호의들은 고맙지만 다음날 나는 땡땡이 친 학교를 가야하는 관계로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야 했다. 쇼핑 센터가 보이는 도로 옆에는 어린 아이들이 나와 피켓을 들고 있었다. '오바마를 지지하면 클랙슨을 눌러줘~' 란다. 11살 줄리엣과 15살 마이클은 오누이인데, 맞은편 인도에선 이 둘의 엄마가 혼자서 피켓을 흔들고 있다. 반응이 어떠냐고 물어보니, "보시는 대로 무지 좋아~"란 '거만한' 대답을 한다.

그도 그럴 만한 게 내가 보기에도 이 꼬마들을 못 봐서 깜빡 지나치는 차를 빼고 거의 둘 중의 한 대는 클랙슨을 누르고 있었다. 

'오바마 프레지던트',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오바마 프레지던트'

난 오바마가 당선되는 이 역사적인 장면을 뉴저지 호버켄 오마바 자원봉사센터에서 봤다. 1년 넘게 아무 대가없이 열정적으로, 헌신적으로 자원봉사 했던 이들은 CNN을 통해 나오는 '당선 확정' 소식에 서로 얼싸안고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서로 격려하고 포옹하고 키스하며 진심으로 감격스러워 하는 모습에 아무 상관없는 나도 그냥 '울컥'했다. 그렇게 그들은 오늘의 승리를 위해 열정과 정성을 모아 최선을 다한 뒤 그걸 만끽하고 있었고 나도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줬다.

맨해튼 타임스퀘어엔 천여명의 또 다른 사람들이 모여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속에서 연설하는 오바마를 그윽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속에서 가장 뜨겁게 환호하고 날뛰는 이들은 10대에서 20대를 넘나드는 어린 친구들이었다. 

요란한 피어싱에 어지럽게 문신을 그려넣은 이들이 오바마를 외치고 너무 단순해서 유치하다 싶은 "Yes We Can"을 연호하는 모습은 낯설고 신기했다. 이라크에서 아프칸에서 그리고 영원할 것 같았던 저 월가가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며 상처받고 고통 받는 이들이 진심으로 바라는 '희망'은 어떤 모습일지 나도 그들처럼 궁금해졌다.

필라델피아에서 뉴욕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둠이 내린 도로를 달리며 친구가 말했다. 작년부터 오바마 자원봉사를 하느라 자기 돈 써가며 매 주말이며 휴가를 고스란히 반납했던 친구다. 

"나 내일부터 뭐하지? 너무 좋긴 한데 뭔가가 휑하고 빠져나간 느낌이야."

그는 뉴스에서 오바마가 나올 때마다 더 열심히 그를 지켜보고 응원할 것이다. 오바마는 이런 수십 만의 자원봉사자들에게 빚을 지고 시작하는 거다. 누가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는지, 누가 그를 위해 고군분투했는지 잊지 않는다면 44대 미국 대통령 버락 후세인 오바마는 훌륭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당선 확정 소식에 서로 얼싸안고 울고 있는 자원봉사자들
당선 확정 소식에 서로 얼싸안고 울고 있는 자원봉사자들최현정

 오바마 당선이 확정되자 열광하는 지지자들의 모습.
오바마 당선이 확정되자 열광하는 지지자들의 모습. 최현정

덧붙이는 글 | 최현정 기자는 현재 뉴욕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최현정 기자는 현재 뉴욕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오바마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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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부터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뉴욕 거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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