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보는 날, 난 진정한 제대를 했다

[수능의 추억] '학벌욕구'와 사랑에 대한 '증오'로 다시 든 교과서

등록 2008.11.12 12:30수정 2008.11.12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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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년 만에 난 다시 수능 시험을 봤다.
4년 만에 난 다시 수능 시험을 봤다.권우성

매년 수능(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있는 11월 중순경이 되면 옛 생각이 난다. 제대로 된 공부를 하고 싶은 지적 호기심의 발로였는지, 학력신장에 대한 욕구였는지, 나를 떠나간 사람에 대한 증오였는지 모를 복잡한 감정을 듬뿍 담아 펜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난 수능을 두 번 봤다. 재수인 셈이지만 평범한 재수는 아니었다. 한 번은 고3때인 2001년에 보고, 두 번째는 군 제대 직후인 2005년에 봤다. 나이로는 '장수생'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정말 공부가 하기 싫었다. 당구장 가고, 술 마시는 데 드는 돈은 아깝지 않았지만, EBS 문제집을 구입하는 돈은 무척이나 아까웠다. 교복 바지통을 줄이는 비용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잃어버린 교과서를 다시 사는 데 드는 1000원은 아끼고 싶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이해찬 1세대'(83년생)가 맞은 저주라며 나 자신을 위로했던 적도 있지만 그건 핑계일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많은 청소년들이 그러하듯, 남에게 꿀리지 않는 '노는 학생'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건들건들,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평균 50점의 열등생, 군대서 '학력신장 욕구' 느끼다

내신 점수는 평균 50점 정도에서 오르락내리락 했고, 이 상황에서 본 수능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배치표를 보며 적당히 점수를 맞춰 몇 개의 대학에 원서를 냈고, '운 좋게' 서울의 한 전문대학에 입학했다. 고1때 담임선생님은 "1학년 때 (학교생활이) 끝날 줄 알았는데, 용케 졸업을 하는구나"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이것도 내게는 큰 성공이었다.


그 후, 다시는 내 인생에서 '수능'이란 단어는 없을 줄 알았다. 팔자에도 없는 먼 얘기 같았다. 하지만 '특별한 계기'는 생각도 못한 곳에서 우연히 찾아오는 법. '수능'이란 단어가 나의 머릿속에 다시 맴돌기 시작한 것은 뜻밖에도 군 복무 중이던 지난 2004년이다.

내무반에 누워 잠깐 동안 떠올렸던 학창시절에 대한 미련은 나의 인생 방향을 180도 바꿔 놨다. '전공도 적성에 맞지 않고, 제대 후 마땅히 할 것도 없는데 수능이나 다시 볼까'라던 막연한 생각이 결국 나를 늦깎이 수험생으로 만들어 버렸다.


하룻밤 사이 생각했던 작은 나비의 날갯짓을 태풍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굳은 결심이 필요했다. 나는 다음날 곧바로 주위 사람들에게 "나 수능 준비에 돌입할 거니까 흔들릴 때마다 옆에서 붙잡아 달라"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에게 맨 처음 이 사실을 알렸고, 부모님·친구들·내무반 '전우'들에게 차례로 나의 다짐을 소문내고 다녔다. 공부하는 습관이 없었던 나로서는 이렇게라도 해야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완주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뒤늦게 한 공부는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2005년 7월에서 11월까지, 제대를 한 날부터 수능일 까지는 고작 4개월의 시간밖에 없었다. 제대를 해도 제대한 것 같지 않았다. 동기들은 개구리 마크를 달고 집에 간다며 함박웃음을 짓던 날, 나는 전혀 들뜬 기분이 나지 않았다. 나의 진정한 제대일은 2005년 11월 23일(당시 수능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학원을 다닐 돈도 없었고, 집에 부담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집과 집근처 독서실을 오가며 독학에 들어갔다. 4년 만에 다시 편 교과서, 고교수학이 그렇게 어려운 지는 그때 처음 알았다. 국사책은 10번을 봐도 외울게 많다는 것을 23살이 돼서야 알게 됐다.    

힘들었던 고립생활... 다니던 대학 자퇴하며 '배수의 진' 치다

 4년 만에 다시 편 교과서와 문제집, 고교수학이 그렇게 어려운 지는 그때 처음 알았다.  (자료사진)
4년 만에 다시 편 교과서와 문제집, 고교수학이 그렇게 어려운 지는 그때 처음 알았다. (자료사진)김귀현

26년 동안 나름 편치 않은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하지만, 수능을 다시 준비했던 4개월 동안만큼이나 힘들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집과 집 바로 앞의 독서실만을 오갔던 고립된 생활은 갓 제대한 한 젊은이를 반 우울증 환자로 만들었다. 이 생활을 겪은 후, 나는 절대로 고시생이 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답답하던 철망 밖으로 나왔는데, 이제는 더 좁은 골방 안에 들어앉아 있어야 한다는 현실. 그것도 고3때와 군대시절과는 달리 혼자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은 '세상을 다 가질 것만 같은' 예비역의 마음을 극심하게 옥죄었다. 그때 나에겐 1명의 대화상대가 절실했다. 왜 재수생들이 비싼 돈을 주고 학원에 다니는지를 그제야 깨닫게 됐다.

그래서 초기에는 포기하고 싶은 적도 많았다. '잘 될 거란 보장도 없고, 머리도 굳은 것 같은데 그냥 다니던 학교 졸업하고 취업이나 하지 뭐'란 생각이 끊임없이 나를 유혹했다. 제대하고 일주일 정도는 도저히 마음이 잡히지 않아 매일 같이 친구들과 만나 술을 마셨다. 그때마다 두 가지 의견이 나의 머릿속에서 전쟁을 치렀다.

'내일부터는 꼭 공부해야지' VS '그냥 포기할까?'

나는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술을 끊고 공부에 전념하든지, 아니면 공부를 포기하고 다른 길을 알아보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고심 끝에 나는 미련 없이 술을 끊기로 했다. 그동안 수능 본다고 소문내고 다닌 게 창피해서라도 쉽게 공부를 포기할 순 없었다. 그래서 다니던 학교를 자퇴하는 것으로 배수의 진을 치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좋은 대학' 입학해 날 떠난 그녀가 날 찾길 바랐다

이를 악물고 공부를 해야 했던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공부하는 동안 옆에서 잘 보살펴줄게"라고 약속했던 여자 친구가 병장 진급을 앞둔 시점에서 홀연히 나의 곁을 떠났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1000일 가까이 사랑을 나눴던 그녀가 단지 전화 한통으로 이별을 통보해오다니…. 휴가 중 얼굴이라도 한 번 보며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달라던 나의 마지막 요구마저 외면한 채, 그녀는 냉정하게 수화기를 놓았다.

수능공부를 위해 들었던 나의 펜 속에는 그녀에 대한 증오심도 가득 서려 있었다. 나는 그녀가 보인 냉정한 모습을 떠올리며, '중간에 포기하지 않기'로 했던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채찍질로 삼았다. 수능이 끝난 후, 그녀에게 보란 듯이 외치고 싶었다. 너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지만, 나는 너와 한 약속을 결국 지켜내고 말았다고….

나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했다. 좋은 대학에 가면 혹시라도 그녀가 나를 다시 찾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생각도 새벽부터 나를 독서실로 향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장기간 다른 남자와 연애를 하고 있다는 소식만 간혹 들려올 뿐이었다.

4년보다 길었던 4개월이 지나고, 11월 수능일이 다가왔다. 수능 전 극심한 가슴앓이를 했던 순간들과는 다르게, 수능 당일은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했다. 공부 기간도 짧았고, 고등학교 때 워낙 공부를 못했던 터라 마음을 비워서 그런지, 큰 부담감 없이 시험을 치렀다. 

수능이 끝나고, 입학원서를 쓰던 그해 겨울은 그렇게 초연한 시간들이었다. 큰 욕심은 비우고 평소 내가 가고 싶었던 사회복지학과만을 골라 지원했다. 그리고 나는 새벽마다 할머니가 하느님께 기도했던 '집에서 밥 해먹고 다닐 수 있는' 대학에 입학했다.

속칭 말하는 SKY대학은 아니었지만, 고등학교 친구들은 나의 대학 입학 소식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나도 만족스러웠다. 특히나 24살에 맞는 새내기 생활, 궁합도 안 본다는 4살차 동생들과 함께 하는 풋풋한 대학 생활이 너무나도 기대됐다.  

꿈에 그리던 대학 입성, 그 후에는...

내일(13일)이면 다시 수능일이다. 생각해보면 3년 전 수능을 준비하느라 끙끙댔던 나의 모습도 안쓰러웠고, 내일 수능을 치러야 할 예비 대학생들의 모습을 봐도 안쓰럽긴 마찬가지다. 맘껏 뛰놀고,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10대부터 '고시생'을 만들어버리는 한국에 태어난 '원죄'인지도 모르겠다.

수능 때문에 울고 웃었던 순간들은 어느덧 훌쩍 지나가고, 나는 이제 우리나라의 입시제도와 대학 서열화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불온한' 생각을 가진 대학생이 되어 버렸다.

수능 점수 1점에 목매고, 명문대 입학이 사랑했던 그녀에게 '복수하는 길'이라 여겼던 내가 현 입시제도와 학벌사회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변한 것이다. 이런 거 보면 세상 참 재미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수능 시험이 치러진다.
올해도 어김없이 수능 시험이 치러진다.김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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