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중턱인 그곳은 해발 1천 미터가 넘어, 적도를 접하고 있는 나라에선 보기 드물게 연중 선선한 기후를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편지에 "무더운 곳에서 고생 많다"는 말을 적어 보내면, 속으로 웃곤 했었다. 게다가 일년 내내 울타리를 두른 국화와 장미 등을 쉬이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밤에는 쏟아지는 별빛 아래서 불을 두른 뱀처럼 흐르는 용암 모습에 경탄하곤 했던 아름다운 곳이었다.
단지 불편한 것이라곤, 인적이 드물어 해가 기울면 끊기는 교통편과 전화가 없었다는 정도였다. 그곳에서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여가라곤 철 지난 한글 월간지를 읽고 또 읽는 것과, 간혹 슬리퍼를 끌고 동네 마실을 다니다 잠간 들르는 찻집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한담 정도였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나는 평소에 들르던 찻집을 지나, 잘 가꿔진 너른 정원에 간간이 파라솔이 놓여 있고, 내부에는 전통 문양의 그림들이 즐비한 조금 고급스러워 보이는 찻집에 들를 기회가 있었다. 들르려고 해서 들른 것이 아니라, 그곳 찻집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정원 잔디에서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에 끌려 들른 것이었다. 그 사람은 개미를 잡고 있었는데, 어릴 적 우리가 시골에서 개미를 잡던 모습과는 달리, 한 쪽 구멍엔 안이 훤히 보이는 흰색 플라스틱 봉지로 망을 만들고, 반대편 구멍엔 연기를 넣어 개미를 잡고 있었다. 그 사람은 개미를 잡아 먹을 것이라고 했다.
사건은 그렇게 시작됐다. 난생 처음 보는 모습에 흥미를 느껴 들른 찻집엔 해가 떨어지기 전인데도 손님이라곤 외지 사람으로 보이는 젊은이 몇이 보일 뿐이었다.
잠시 주위를 살피고 있는데 종업원으로 보이는 젊은이가 나타나더니, 대뜸 "도죠"하며 의자를 뒤로 당겨 주는 것이었다. 나는 도죠라는 일본어에 기분이 살짝 나빠졌다. 괜히 차별을 받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젊은이는 나의 표정을 재빠르게 읽었는지, 아니면 내가 일본인이 아니란 걸 눈치 챘는지 역시 약간 실망한 기색을 띠며 자리를 뜨려하는 것이었다.
괜히 심술이 나기 시작한 나는 잘 하지도 못하는 일본어지만, 짐짓 일본어를 빠르고 굵은 목소리로 "와따시와 강꼬꾸진데쓰, 아나따와 니혼진데스까?"(나는 한국인입니다. 당신은 일본인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젊은이는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머뭇거리며 눈만 꿈뻑거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나는 다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아나다와 니혼고 스고이데쓰까?"(당신은 일본어를 잘하십니까?)라고 재차 물었다.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사실 나는 일본어를 배웠다고는 하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모르는 사람이나 다를 바 없는 그런 사람이었지만, 상대편 젊은이는 나보다 더 맹물이라는 것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그제야 나는 인도네시아어로 "아는 일본어 있으면 말해 봐요"라고 주문했다. 그러자 더욱 당황해진 기색이 역력한 이 젊은이는 호흡을 한 번 가다듬더니, 천천히 또박또박 한 단어 한 단어를 내뱉는데, 그만 웃겨서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상대편 젊은이는 자신이 늘 보아왔던 일본 제품을 만드는 회사 이름들을 열거하던 중, 맨 마지막으로 인도네시아 조미료시장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아지노모또로 끝을 맺는 것이었다. 포복절도할 지경이었지만, 내심 약이 올라 있던 나 역시 또박 또박 끊으며, 한 단어 한 단어를 했다.
"스즈끼, 야마하, 가와사끼, 혼다, 아지노모또!"
"그래? 그럼 한국어는 좀 아나요?"
"……."
"내가 가르쳐 줄게요. 따라해 봐요."
"네"
"현대, 대우, 삼성, 기아(여기서 잠시 끊고 나서, 강하게), 미원"
젊은이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종종 그 찻집에 들러 차를 마셨다. 설탕이 덜 녹아있기 마련인 단맛이 가득한 우리 돈 100원 남짓한 따끈한 차를 마시며, 몇 번인가 그 젊은이를 불러 자리에 앉히려 해 봤지만, 늘 실패였다.
처음 인상과는 달리 그 젊은이는 손님이 없는 와중에도 "영업 중에 손님 테이블에 함께 앉을 수 없다"며 거절할 정도로 성실하고 반듯했다.
얼마간 세월이 흘러 그에게 첫날 인상에 대해 슬쩍 물어보았다.
"왜 그때 일본어로 인사했어요?"
"그냥, 여긴 일본 사람들이 종종 오니까요."
"한국 사람들은요"
"가끔 오긴 오지만, 여럿이 함께 술 마시러 오지, 차 마시러 오는 사람은 없어요."
이유는 간단했다. 혼자 찻집에 들른 나를 종종 들르는 일본인으로 알고 말을 뱉었는데, 순간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고 돌아서려 했지만, 상대가 만만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물어봤다.
"혹시 한국인이라고 차별하려고 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런 건 아니고, 한국 사람들이 술을 마시면 가게 문을 닫을 시간 지나도 나가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요."
"그 말은 일본 사람은 점잖고, 한국 사람은 귀찮게 해서 나 몰라라 하고 싶었던 거네요?"
"아이… 꼭 그런 건 아니라니깐요. 그런데 술 마시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나? 술 안 마셔요!"
"정말요?"
"네, 전혀!"
이렇게 해서 우리는 비록 손님과 점원이지만, 점차 편히 차를 마시기도 하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20대 후반의 까칠했던 나의 성격도 예전과 같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만약 그때 속상하다고 속으로만 삭였다면, 나는 정겹게 이야기를 나눌 피부색이 다른 친구를 얻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차별은 어쩌면 자신이나 누군가가 부당하게 대우를 받는다 생각해도 나 몰라라 하며 지나가는 태도에서 발생하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덧붙이는 글 | '차별의 기억' 응모 글입니다.
2008.11.18 15:33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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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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