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배떠나는 이지누를 잡지 못해 아쉬워하는 할배
호미
그 뒤 시간 날 때마다 찾아가 나락 베고 낟가리 쌓고 탈곡한 나락 싣고 정미소로 나르는 힘든 할배 일을 거들었다. 봄에는 고추 모종 돕고, 여름이면 논두렁을 깎았다. 홍시며 미나리며 호박 등이 할배가 주는 새경이었다. 그러면서 정이 담뿍 들었다. 할배는 일 마치고 떠나는 이지누를 자고 가라며 붙잡기 위해 애쓴다.
"자고 가나? 올 가야 되나?""오늘 갈랍니다.""와, 자고 가지. 벌써 저녁답인데…….""아입니더…….""그래……. 가야 되마 가야지……."(책 속에서)그러던 어느 날 이지누는 찔레꽃 곁을 지나는 할배를 불러 세우고 "할배 몸에서 찔레꽃 향내가 난다"고 너스레를 떤다. 할아버지는 펄쩍 뛰며 부인한다. "꽃은 저짝에 있는데 냄새가 왜 나한테서 나느냐"며 "동네 개도 웃을 소리 하지도 말라'며 손사래를 친다. 그런 할배를 이지누는 몇 번이고 더 놀려준다.
그리고 비로소 깨달았다. 코로 맡는 향기가 진한 사람일수록 사람의 향기는 적고, 사람의 향기가 강한 사람에게서는 코로 맡을 수 있는 향기가 아니라 마음으로 맡아야 하는 향기가 풍긴다는 사실을.
"사람 맘대로 끌고 댕기마 되는가, 어데"이지누가 만난 찔레꽃 할배는 배운 것도 가진 것 없이 이 땅을 살아간 전형적인 농민이다. 백여 년의 짧지 않은 세월을 세상의 중심에서 벗어나 우물쭈물 살아온 삶이다. 많이 배운 사람들은 나라를 팔아 부귀와 영화를 거머쥐고, 그 후손들조차 떵떵거리며 권세를 탐하는 동안 아흔 여섯이 되어서도 논농사 밭농사를 지었다.
할배는 자신의 땀이 들어가지 않는 건 욕심내지 않았다. 평생 살면서 몸으로 익힌 삶의 경험을 믿고 고집스레 살아왔다. 할배가 백여 년 살아오면서 일군 게 논밭만은 아니다. 자신의 삶을 일군 것이다.
그렇게 일군 할배의 삶에선 은은한 향기가 난다. 소와 함께 느려터지게 걸어가는 할배에게 왜 그리 천천히 가느냐고 묻자 답하는 말에 그 향기가 물씬 묻어난다.
"봐라. 저것도 우리맨치로 말을 모 하이 짐승이라카는 거지, 사람하고 똑같은 기라. 사람도 배고프마 밥 묵고 그래 하는데 저것도 배고프마 밥도 묵고 지 묵고 자븐 것도 무야지. 어데 사람만 지 묵고 싶은 거 무라카는 법이 있디나. 철따라 풀도 다 다르거든. 사람들도 안 그렇디나. 철마다 나는 기 다른데. 그라니 우짜노. 소도 지 물 꺼 찾아 묵는데 가마이 놔 또야지. 사람 맘대로 끌고 댕기마 되는가 어데."(책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