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소송 아쉬움, 늦깎이 졸업장으로 달래길"

순천 남초교, '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에게 63년 만에 졸업장 전달

등록 2008.12.10 12:04수정 2008.12.10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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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정신대' 피해자 김정주(78·서울 송파구) 할머니가 뒤늦게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게 됐습니다. 초등학교를 마친 지 63년 만의 일입니다.

김정주 할머니와 언니 김성주(80·경기도 안양시) 할머니의 운명이 뒤틀리기 시작한 건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인 1944년경.

그해 5월 어느 날, 초등학교 일본인 담임이었던 오가끼 선생은 동생 정주를 시켜 언니를 학교에 한 번 나오도록 했습니다. 언니는 당시 전남 순천 남초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가사 일을 돕던 중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자매의 뒤틀린 운명

 전남 순천 남초등학교 6학년 재학중 근로정신대에 강제동원된 김정주 할머니.
전남 순천 남초등학교 6학년 재학중 근로정신대에 강제동원된 김정주 할머니.이국언
"일본에 가면 상급학교에 갈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

어머니는 갑작스런 병으로 일찍 여의고,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경남 진해의 한 공사장에 징용으로 끌려가고 없던 상태. 집에서 불과 전봇대 하나 사이를 두고 살던 오가끼 선생은 이런 집안의 이런 내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처지였다고 합니다. 며칠 뒤 언니는 일본 길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한 해가 바뀐 1945년 2월경. 이번엔 오가끼 선생이 동생을 다시 불렀습니다. 졸업을 불과 며칠 남겨 놓지 않은 때였습니다. 그녀의 나이 만 13살.


"일본에 가면 언니도 만날 수 있고, 언니와 같이 생활하다 언제든지 오고 싶을 때 오면 된다."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안 계신 상태에서, 믿고 의지하던 언니마저 일본으로 떠난 뒤였습니다. 언니를 볼 수 있다는 그 말 한마디만 들어도 벌써 눈물이 맺힐 것만 같았다는 할머니…. 자매는 그렇게 차례로 일본 길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언니를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상급학교에 갈 수 있다는 것도 모두 거짓이었습니다.

언니 김성주는 일본 최대의 군수업체인 미쯔비시중공업의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에서, 동생 김정주는 도야마에 있는 후지코시 공장에서 주린 배를 틀어쥐고 배고픔을 참아가며 하루 10시간씩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내 죄는 일본에 갔다 온 것 때문"

 아무것도 모른 채 일본에 끌려간 나이 13~15세의 어린 소녀들. 해방후 고국에 돌아와 더 큰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일본에 끌려간 나이 13~15세의 어린 소녀들. 해방후 고국에 돌아와 더 큰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이국언

해방의 기쁨도 잠시, 가부장제 뿌리가 완연한 사회에서 이들에게는 더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언니 김성주는 결혼 한 달여 만에 일본에 다녀온 사실이 들통나고 말았습니다. 동생 역시 그 화를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술만 먹고 오면 시비고 폭력이었습니다. '날 속이고 결혼했다. 너는 일본에서 몸 팔다 온 년'이라는 것입니다. '위안부'와는 다르다는 설명 따위는 무의미했습니다. 그럴수록 머리채를 잡혀야 했습니다.

남편은 가는 곳마다 여자를 끼고 살았습니다. 심지어 어느 날은 집에까지 첩을 데리고 와 한 방 생활을 하는 수모까지 당했다는데, 차마 더 들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어린 아들을 등에 업고 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나이 서른다섯이었습니다.

"자식한테 최근까지도 숨기고 살았어요. 아들은 아버지와 헤어진 게 가정불화 때문인 것으로만 알고 있었을 거예요. 그땐 어렸을 때니까…. 언니나 나나 일본 갔다 온 것 때문에 신세 이렇게 됐어요. 내 죄는 일본 갔다 온 것 그것 하나예요."

이제 남은 것은 가난과 병마뿐. 할머니는 집 한 채 없이 지하 사글세 단칸방에서 어린 손자와 함께 쓸쓸한 노후를 맞고 있습니다. 뒤늦게 용기를 내 일본정부와 후지코시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지만, 도야마 지방법원은 지난해 9월 19일 기각 판결하고 말았습니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모든 문제가 끝났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관련 기사: 2008년 11월 30일 "어떤 때는 이곳이 내 나라인가 싶다")

63년 만에 돌아온 졸업장... 연보라빛 내복 한 벌

 졸업을 목전에 두고 일본인 선생의 꾀임에 넘어가 근로정신대에 강제동원된 김정주 할머니가 63년만에 모교 순천 남초등학교로부터 졸업장을 받게 됐다.
졸업을 목전에 두고 일본인 선생의 꾀임에 넘어가 근로정신대에 강제동원된 김정주 할머니가 63년만에 모교 순천 남초등학교로부터 졸업장을 받게 됐다.이국언

할머니를 몇 차례 뵐 때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일본으로 끌려가는 바람에 초등학교 졸업장 한번 못 만져봤다는 것입니다.

순천 남초등학교(교장 유채중)와 국가기록원 등에 확인해보니, 다행히 일부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미 졸업은 한 상태였습니다. 다만 졸업 직전 일본에 끌려가는 바람에 정작 본인 손으로는 졸업장을 만져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엊그제 반가운 소식 하나가 들려왔습니다. 할머니의 모교 순천 남초등학교에서 할머니를 위해 별도로 졸업장을 하나 만들어 드린 것입니다. 할머니의 소식을 듣고 유난히 안타까워하던 교장 선생님의 배려 덕분입니다.

졸업장을 장식하고 있는 크리스털 액자가 유난히 깨끗해 보입니다. 교장 선생님은 또 특별히 할머니를 위해 연보라빛 내복 한 벌까지 준비하셨습니다. 개교 100주년을 맞아 제작한 학교 100년사 한 권까지….

사실 졸업장을 전달키로 한 것은 지난 7월경이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의 건강이 여의치 않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조촐하지만 따뜻한 점심 한 끼라도 대접하고 싶다는 교장 선생님의 뜻도 있고, 이왕 모교도 둘러보도록 할 겸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시일을 조금 늦춰 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인 듯 합니다. 할머니의 건강은 좀처럼 호전되지 않는 듯 합니다. 결국 한 해의 마지막인 12월, 더 늦출 수도 없어 소포를 통해 전달하기로 했습니다.

유리가 깨질까봐 박스 안에 신문지를 말았다 풀었다 몇 번이나 부산을 떨었던지 우체국 한 여직원이 '무슨 물건인데 그러느냐'며 사연을 묻더군요. 그러고는 도중에 혹시 무슨 탈이라도 날까봐 '파손 주의'가 적힌 스티커를 몇 장씩 눈에 보이는 대로 갖다 붙이면서 본인이 더 애달아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선물이 될 것 같다는 말과 함께….

"정말입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저 하나 때문에 모두 귀찮게 만들어서…."

수화기로 들려오는 할머니의 가녀린 음성에는 벌써 물기가 젖어 있습니다. 우체국을 나서는 내내 여러 마음이 교차합니다. 나라가 힘없던 시절, 죄 없는 한 백성이 겪어야 했던 고통치고는 너무 초라하게 남은 삶의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찬바람 부는 한 해의 끝자락, '63년 만에 돌아온 졸업장'이 할머니의 고단한 삶에 잠시나마 기쁨과 위로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연보라 빛 내복 한 벌에 모교의 따뜻한 정이 느껴진다. 순천 남초등학교 유채중 교장이 졸업장과 함께 김정주 할머니에게 드리는 선물.
연보라 빛 내복 한 벌에 모교의 따뜻한 정이 느껴진다. 순천 남초등학교 유채중 교장이 졸업장과 함께 김정주 할머니에게 드리는 선물.이국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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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다음 블로거뉴스에도 송고할 예정입니다.


덧붙이는 글 다음 블로거뉴스에도 송고할 예정입니다.
#근로정신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졸업장 #태평양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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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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