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철 전 삼성그룹 법무팀장과 김영희 변호사가 지난 3월 28일 오전 서울 회현동 우리은행 본점에서 열린 우리금융지주 주주총회에 참석해 삼성그룹의 차명계좌를 개설하는 과정에서 금융실명제를 위반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총회를 마친뒤 회의장을 떠나고 있다.
유성호
올해 초 김용철 전 삼성그룹 법무팀장의 폭로로 우리은행이 삼성비자금과 관련된 차명계좌를 개설·유지하는 데 적극 협조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는 금융실명제법을 위반한 행위였다. 우리은행이 삼성의 지배를 받고 있는 금융회사가 아닌데도 삼성 비자금 창구로 이용된 것이다.
현재 국회에 제출된 은행법·금융지주회사법·공정거래법 등이 개정되면 이러한 불법행위는 더욱 많아질 수 있다. 재벌들이 은행을 소유해 사금고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은행법] 대기업의 은행 소유 등 허용... "재벌 사금고화 우려" 이명박 정부와 여당은 재벌이 주도하는 금융산업 재편을 위해 은행법·금융지주회사법·공정거래법 등 관련법 개정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이들 개정안의 공통점은 '금산분리 무력화'다.
금산분리는 금융기관의 산업자본 지배나 산업자본의 금융기관 지배를 막는 조치다. 이는 재벌이 금융기관을 이용해 지배력을 과도하게 확장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가 금산분리 완화를 시도한 데 이어 이명박 정부는 아예 금산분리 무력화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먼저 은행법 개정이다. 국회 정무위원회 한나라당 간사인 박종희 의원이 대표발의한 은행법 개정안은 대기업이 은행지분을 현행 4%에서 10%까지 직접 소유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그동안 은행을 소유하고 싶었던 재벌들이 자신들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금융전문가는 "우리나라 대형은행 대주주의 지분이 4~5%밖에 안 된다는 점을 헤아릴 때 지분이 10%만 있더라도 은행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는 걸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재벌이 은행을 소유하게 되면 은행이 재벌의 사금고로 전락할 수 있고, 이는 자금흐름을 왜곡해 은행의 부실화로 이어질 수 있다. 또 이는 금산분리를 강화해온 세계적 추세에 역행하는 것이다.
지난해 한국금융연구원의 실태조사 자료에 따르면, 세계 100대 은행 중 산업자본이 지분 4% 이상을 소유한 경우는 17곳에 불과했다. 이 가운데 제조업체가 은행을 소유한 경우는 4곳뿐이었다. "산업자본의 은행소유에 대한 명시적 규제가 미국처럼 강하지 않은 유럽에서조차 산업자본의 은행소유는 대단히 예외적 현상"이라는 지적이다.
허태열 한나라당 의원이 발의한 은행법 개정안은 여기에서 더 나아갔다. 먼저 은행지분을 4% 이상 소유한 산업자본이 최대주주가 되거나 경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금융당국의 사전 승인, 은행임원 선임 제한 등의 단서를 달고 있지만, 산업자본의 은행 경영을 합법화한 것이다.
또 사모펀드(PEF)가 은행을 인수할 수 있는 기준도 대폭 완화했다. 현행법상 산업자본이 10% 이내에서 투자한 사모펀드만 금융주력자로 인정받아 은행을 인수할 수 있다. 그런데 앞으로는 이 기준이 '30% 이내'로 완화되고, 특히 서로 다른 대기업 소속 계열사들의 경우에는 '50% 이내'로 완화된다.
이는 산업자본이 사모펀드를 통해 은행을 인수할 수 있음을 뜻한다. 하지만 사모펀드인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한 뒤 은행의 경쟁력 강화보다는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매각을 서두르고 있는 현실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국민연금 등 62개 공적 연기금도 은행을 인수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은행 부실화와 함께 연기금까지 부실해질 경우 밑빠진 독에 엄청난 혈세를 쏟아야 하는 부작용이 예상된다.
[금융지주회사법] 삼성 지배구조 개편과 밀접... "이재용 지배권 정당화하는 법"또 다른 '금산분리 무력화 법안'인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은 정부가 입법예고했지만 결국 의원입법으로 발의됐다. 지난 11월 24일 공성진 한나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에 따르면, 금융지주회사(은행·증권·보험 등)가 비금융지주회사(산업자본)를 소유하는 것이 허용되고, 산업자본의 은행주식 보유기준도 완화된다.
은행을 제외한 보험·증권지주회사가 제조업 자회사를 둘 수 있다. 다만 증권지주회사의 경우 금융자회사에 제조업 손자회사를 둘 수 있지만, 보험지주회사의 경우 제조업 손자회사를 거느릴 수 없다.
이러한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은 삼성의 지배구조 개편과 밀접하게 닿아있다. 이건희 전 회장의 장남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가 계속 삼성그룹을 지배할 수 있도록 정당화해주고 있다는 것. 그래서 참여연대 등은 '삼성특혜법'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상민 참여연대 시민경제위원회 간사는 "현행법상 금융지주회사는 비금융회사를 자회사나 손자회사로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 등으로 이어지는 출자구조가 깨진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이재용 전무는 에버랜드를 지배해 삼성생명과 삼성전자를 지배하고 있는데, 에버랜드가 금융지주회사가 되면 이재용 전무는 삼성생명과 삼성전자를 (동시에) 지배할 수 없고 생명만 가지게 된다. 이전에는 회계기준 변경이라는 꼼수를 통해 유예시켰지만 조만간 에버랜드가 금융지주회사가 될 수밖에 없다. 삼성의 목표는 지주회사가 되더라도 삼성생명이 삼성전자를 지배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공성진 법안은 금융지주회사로 전환하더라도 그런 지배상태를 유지하도록 해준다."이종태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도 "삼성은 몇 년 안에 계열분리를 하거나 금융지주회사로 전환해야 하는데 이렇게 갈 경우 현재의 지배구조가 흔들릴 수 있다"며 "하지만 공성진 법안대로 금융지주회사법이 개정되면 산하 계열사에 대한 이건희 일가의 지배권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금융지주회사로 전환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국회 정무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여권에서는 현재의 순환출자구조를 인정하는 쪽으로 법안을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흐름이 있었다"며 "하지만 그렇게 할 경우 '삼성을 위한 입법'이라는 것이 뻔히 드러나기 때문에 수면 아래로 들어갔다"고 귀띔했다.
이 관계자는 "순환출자구조를 인정하는 개정안에 대한 반대가 거세기 때문에 여권은 공성진법안에 주력하겠다는 것"이라며 "삼성의 처지에서는 공성진법안이 만족스럽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보험지주회사는 제조업 자회사나 손자회사를 둘 수 없다'는 개정안 내용이 삼성그룹에는 아주 아쉬운 대목이라는 얘기다. 이 규정 때문에 삼성그룹은 금융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더라도 삼성생명이 삼성전자를 거느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금융위원회에 비은행지주회사 전환계획을 제출한 대기업집단의 경우 순환출자, 공동출자 등에 대한 규제를 최장 7년(5년+2년)간 유예한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공성진 의원은 "지분정리에 따른 충격완화"를 이유로 들었지만, 이는 삼성의 불법적 지배구조를 7년간이나 유지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