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포는 90년까지만 해도 국내 쥐치포 생산량의 70-80%를 차지하던 곳이었다.
김대홍
"그 때 삼천포에 들어서면 비린내가 진하게 풍겼습니다. 곳곳에서 쥐치를 말렸거든요."
유철수(35)씨의 고향은 지금은 사천시 소속이 된 삼천포다. 정확한 주소는 경남 고성군 하이면이지만 생활권이 삼천포였다. 학교도 모두 삼천포였고, 친척도 모두 삼천포에 살고 있었다. 고성읍에 나간 것은 초등학교 5학년이 되어서였다. 그 뒤에도 고성읍에 갈 일은 없었다. 고향을 삼천포라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철수씨는 삼천포를 '쥐포'로 기억한다. 어린 시절 흔하게 먹었던 간식, 시장에 나가면 여기저기서 쥐치를 말리던 풍경이 눈에 선하다. 그는 당시 삼천포에 있었던 쥐포공장 수를 정확히 기억했다.
삼천포제일중학교 2학년이던 시절, KBS <퀴즈동서남북>팀이 학교에 왔다. 그 때 삼천포에 쥐포공장이 가장 많다는 퀴즈가 나왔다. 문제는 갯수 맞추기. 답은 80여개였다.
쥐포 판매 등 수산업이 호황을 누리면서 시내엔 돈이 넘쳤다. 철수씨 아버지는 잠수부였다. 주로 잡았던 것은 키조개. 지역에선 '게이지'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선금으로 몇 백만원씩 들고 왔다. 돈다발이 방에 굴러다녔다.
게다가 1983~84년엔 삼천포화력발전소가 들어섰다. 국내 최초 유연탄전소식 발전소인데다 화력발전소로선 국내 최대였다. 일자리가 넘치니 외지에서 사람이 많이 들어왔다. 사람과 돈이 넘치고 도시는 북적거렸다. 철수씨가 기억하는 1970~80년대 삼천포다.
90년대 들어 삼천포 경제는 급내리막길을 걷는다. 91년 들어 쥐치가 갑자기 사라졌다. 그 해 잡힌 쥐치는 2822톤. 전 해의 30분의1에 불과했다. 80년대엔 10만톤까지 잡혔었다. 삼천포 지역경제를 떠받들던 산업은 수산업이었고, 수산업 중심은 쥐치가공업이었다. 수온변화가 한 이유라고 알려졌지만, 철수씨는 무분별한 남획도 한 이유였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