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 바다.정자로 걸어가는데 눈이 허리까지 빠졌다.
강기희
밤 9시를 조금 넘긴 시간 속초는 이미 폭설의 도시가 되어 있었다. 사람도 차도 신호등도 멈춰선 폭설의 도시에서 우리는 영화 '닥터지바고'와 '폭풍속으로'의 한 장면을 얘기했고, 가와바타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을 얘기했다.
영화와 소설을 찾아 떠난 길 "평생 잊지 못할 여행을 했네요"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자주 침묵했다. 그 시간 우리는 폭설의 도시에서 닥터지바고나 설국보다도 더 잘 만들고 잘 쓴 영화와 소설을 한 편씩 읽거나 보고 있었다. 우리는 아름답게 펼쳐지는 그 여운을 깨지 않기 위해 각자의 시선으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폭설을 뚫고 도착한 곳은 이름도 짐작할 수 없는 속초의 어느 해안. 어둠이 깔린 밤바다를 보면서 내지르는 환성이나 탄성이라는 것이 현실에 비해 진부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사실을 알아 차렸을까. 무섭게 달려드는 눈발과 거칠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면서 우리는 그 순간 입을 닫았다.
새벽이 되어서야 밀려온 졸음. 눈길이라도 한 시간이면 머물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우리는 돌아가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폭설이 내린 후에 펼쳐지는 장관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숙소를 잡는 일도 쉽지 않았다. 길은 보이지 않았고 어쩌다 숙소로 들어가는 길을 발견했지만 체인을 감은 차도 접근을 하지 못했다. 계기판의 바늘은 바닥까지 내려와 있는 상태. 몸을 뉘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로든 가야했다.
거리를 헤매다 어렵게 잡은 여관. 노무자들이 묵었던 여관이었는지 방에는 빨래줄까지 걸려 있었다. 빨래줄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허기가 밀려왔다. 그러고 보니 눈 구경을 다니다가 저녁식사를 하지 못했다. 여관 주인에게 혹시 먹다 남은 밥이라도 없나 물었더니 컵라면 3개를 구해 주었다.
컵라면을 먹어 치우는 시간에도 눈은 끊임없이 내렸다. 이러다간 속초에 갇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고 습관처럼 모닝콜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