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우리의 삶 속도가 저렇게 느렸다

[폭설 속에서 보낸 1박2일] "예정된 여행 아니었어요~"

등록 2008.12.22 17:03수정 2008.12.22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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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눈 내리는 밤바다. 누구 하나 걸어 들어가도 모를 심연의 밤이다.

눈 내리는 밤바다. 누구 하나 걸어 들어가도 모를 심연의 밤이다. ⓒ 강기희


눈이 내렸다. 어제(21일)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하루를 꼬박 내렸다. 그렇게 내린 눈은 발목을 덮더니 22일 아침엔 급기야 하체까지 잠기게 했다. 얼마나 내렸을까. 보도에는 63cm 가량 내렸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1m는 온 듯 싶었다.

"이렇게 많은 눈을 구경하는 건 처음이야~"


산골 태생인 나도 속초에서 만난 눈의 양을 보고는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내린 눈은 마치 동지 팥죽에 들어있던 새알심처럼 크고 새털처럼 가벼웠다. 하늘을 가득 덮은 눈구름은 하루 종일 내가 머물고 있는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눈이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지난 밤 속초로 갔다. 눈을 구경하지 않고서는 강원도를 떠날 수 없다는 사람들을 태운 차량. 이별의 아쉬움에 우리는 예정에도 없던 길을 떠났다.

머물고 있던 인제군 용대리에서 속초까지는 30분 거리. 하지만 어제는 눈길이었다. 눈길을 달려 미시령에 도착하니 경찰이 통제를 하고 있었다. 그는 체인을 감지 않고서는 속초로 갈 수 없다고 말했다.

경찰의 말에 평소 1만원하는 체인을 5만원이나 주고 감았다. 영화를 공부하는 친구가 동해바다로 가자며 "큐" 사인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 순간 한 편의 영화를 만드는 스텝이었고, 신이 내린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이자 여행자였다.

a 살고 싶으세요? 그럼 체인을 치세요...

살고 싶으세요? 그럼 체인을 치세요... ⓒ 강기희


a 속초 바다. 정자로 걸어가는데 눈이 허리까지 빠졌다.

속초 바다. 정자로 걸어가는데 눈이 허리까지 빠졌다. ⓒ 강기희


밤 9시를 조금 넘긴 시간 속초는 이미 폭설의 도시가 되어 있었다. 사람도 차도 신호등도 멈춰선 폭설의 도시에서 우리는 영화 '닥터지바고'와 '폭풍속으로'의 한 장면을 얘기했고, 가와바타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을 얘기했다.


영화와 소설을 찾아 떠난 길 "평생 잊지 못할 여행을 했네요"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자주 침묵했다. 그 시간 우리는 폭설의 도시에서 닥터지바고나 설국보다도 더 잘 만들고 잘 쓴 영화와 소설을 한 편씩 읽거나 보고 있었다. 우리는 아름답게 펼쳐지는 그 여운을 깨지 않기 위해 각자의 시선으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폭설을 뚫고 도착한 곳은 이름도 짐작할 수 없는 속초의 어느 해안. 어둠이 깔린 밤바다를 보면서 내지르는 환성이나 탄성이라는 것이 현실에 비해 진부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사실을 알아 차렸을까. 무섭게 달려드는 눈발과 거칠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면서 우리는 그 순간 입을 닫았다.

새벽이 되어서야 밀려온 졸음. 눈길이라도 한 시간이면 머물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우리는 돌아가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폭설이 내린 후에 펼쳐지는 장관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숙소를 잡는 일도 쉽지 않았다. 길은 보이지 않았고 어쩌다 숙소로 들어가는 길을 발견했지만 체인을 감은 차도 접근을 하지 못했다. 계기판의 바늘은 바닥까지 내려와 있는 상태. 몸을 뉘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로든 가야했다.

거리를 헤매다 어렵게 잡은 여관. 노무자들이 묵었던 여관이었는지 방에는 빨래줄까지 걸려 있었다. 빨래줄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허기가 밀려왔다. 그러고 보니 눈 구경을 다니다가 저녁식사를 하지 못했다. 여관 주인에게 혹시 먹다 남은 밥이라도 없나 물었더니 컵라면 3개를 구해 주었다. 

컵라면을 먹어 치우는 시간에도 눈은 끊임없이 내렸다. 이러다간 속초에 갇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고 습관처럼 모닝콜이 울렸다.

a 텅빈거리. 느린 걸음으로 출근하는 사람들.

텅빈거리. 느린 걸음으로 출근하는 사람들. ⓒ 강기희


a 속초에서 본 설악산. 설악산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가 짐작되는 날.

속초에서 본 설악산. 설악산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가 짐작되는 날. ⓒ 강기희


아침 7시. 광폭하거나 환상적이던 밤과 달리 햇살이 눈부셨다. 폭설의 도시로 변한 속초 거리는 고요했다. 월요일이었지만 오가는 사람도 드물었다. 그나마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은 버스정류장이라고 짐작되는 곳. 하지만 그들이 기다리는 버스는 좀체로 오지 않았다.

느린 걸음으로 길을 걷는 이들을 본 게 대체 얼마만인가

주차된 차를 움직이기 위해 시도했지만 체인도 소용없었다. 여관에 있던 삽으로 길을 내고야 차는 도로까지 나올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하나 둘 거리로 나왔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가야할 길을 찾았지만 하체까지 빠지는 눈 길을 쉽게 헤치지 못했다.

거리를 오가는 폭설의 도시 사람들. 한숨이 나올 법 했지만 엄청난 폭설 앞에서도 그들은 오히려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출근 시간을 걱정하는 이도 없었다. 길을 걷다가도 아는 이를 만나면 오래 수다를 떨기도 했다.

한없이 느린 걸음으로 길을 가는 폭설의 도시 사람들. 언젠가 화면으로 본 평양의 거리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30년 전 우리가 살았던 속도이기도 했다. 그 순간 나는 전투적인 표정으로 지하철을 환승하는 도시 사람들이 더없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거리를 헤맸지만 문을 연 식당은 없었다. 속초에서 유명하다는 물곰탕 전문 음식점에 전화를 걸었지만 배가 나가지 못해 오늘 영업은 종쳤다고 말했다. 일행 중 속초에 아는 사람이 있어 전화를 걸었더니 만나기는커녕 눈 때문에 대문도 열지 못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지붕의 처마가 내린 눈과 맞닿은 폭설의 도시 속초의 아침은 체념과 느림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임시 휴교를 맞은 아이들은 신이 났다. 아이들은 이른 아침임에도 얇은 비닐을 구해 언덕이 있는 곳으로 모였다. 아이들은 허리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치며 눈썰매를 탔다.

영금정에서 만난 푸른 동해바다는 전날 밤과 같이 오늘도 육지를 쉼없이 때렸다. 간밤에 내린 눈을 다 삼켜버린 바다는 흰 눈처럼 아름다운 파도를 만들었다.

a 길. 그대 설악으로 가는가...

길. 그대 설악으로 가는가... ⓒ 강기희


속초 거리를 돌다 어렵게 발견한 순두부집. 흰눈 같은 순두부를 기다리는데 새 한마리가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먹을 것을 찾지 못해 식당으로 왔을까. 하지만 새는 자신을 내쫓는 사람들이 두려워 냉장고 뒤로 숨어 버렸다.

"누구 새 좀 밖으로 쫓아 주실래요?"

식당 여주인이 우리를 보며 말했다.

"배고파서 온 것 같은데 그냥 두지 그러세요."
"유리창에 머리를 박고 죽을까봐 그래요. 가끔 그런 일이 있었거든요."

여주인의 말에 새를 찾아 보았지만 녀석은 인간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숨어 버린 후였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네요. 차라리 냉장고 뒤로 먹이를 주는 게 낫겠는걸요. 그런 다음 문을 열어두면 알아서 나가지 않을까요?"
"다른 방법이 없으니 그래야겠군요."

그릇을 거의 비워갈 즈음 근처에서 식당을 한다는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일하는 아주머니들이 눈으로 인해 출근을 하지 못하자 옆집으로 식사를 하러 왔다고 했다. 폭설의 도시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었다.

"하루 더 묵고 떠나도 되죠?"

폭설의 도시가 된 속초를 떠나고야 감았던 체인을 풀었다. 미시령을 넘어 처소로 돌아오는데 전화가 왔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곳의 직원이었다.

"오늘 점심 함께 하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 시간 배가 고프지 않았다. 강원도를 떠나는 날이니 점심이라도 한끼 하자는 게 이유였다. 전화를 받은 이는 오늘 강원도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그는 점심을 사겠다는 이에게 말했다.

"하루 더 묵어도 되죠?"
"그럼요, 이렇게 눈이 쌓였는데 어떻게 길을 떠나겠어요."

숙소로 돌아오니 어제 낮부터 하루를 보내며 겪었던 많은 일들이 꿈결처럼 아득했다. 누구는 몇 편의 영화를 본 듯 했다고 하고, 누구는 간밤의 일들을 반드시 소설로 쓰겠다고 했다. 하지만 내 짧은 언어로는 간밤의 일을 정리조차 할 수 없어 멍한 눈으로 컴퓨터 자판만 바라보았다.

a 폭설의 도시. 2008년 12월 22일 속초는 폭설의 도시였다.

폭설의 도시. 2008년 12월 22일 속초는 폭설의 도시였다. ⓒ 강기희


a 영금정. 동명항이 있고 뒤로 설악산이 보인다.

영금정. 동명항이 있고 뒤로 설악산이 보인다. ⓒ 강기희


#폭설 #설악산 #속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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