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오징어와 검복> 표지.
소년한길 제공
마지막으로 그림책을 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뭇하다. 코밑에 수염이 삐죽이 얼굴 내밀던 즈음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입시에 시달리게 된 십대 이후부턴 '마음먹고' 그림책을 본 적이 없다.
그림책을 보며 꿈을 꾸기엔 찌든 삶의 때가 너무 두텁다는 것과 어른과 그림책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속된 단정이 나와 그림책과의 긴 불화를 이어오게 만든 주범이다.
그런 내가 요즘 한 그림책을 천천히 읽고 또 읽고 있다. <오징어와 검복>이란 책이다.
<오징어와 검복>은 일제 식민 시절과 해방 이후 가장 정갈한 조선말로 겨레시를 썼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천재시인 백석이 쓴 동화시 열두 작품 중 하나다.
백석의 동화시에 화가 오치근은 수묵담채 그림을 보태 매혹적인 그림책을 만들어냈다. 시인은 분단과 함께 이북에서 이미 고인이 됐다. 하지만 젊은 화가는 경남 하동 악양의 작업실에서 은거하며 시인의 동화시에 그림을 그려 넣으며 ‘백석 동화시’의 참맛과 참뜻을 되살리려 혼신을 힘을 다하고 있다.
소년한길사에서 출판한 그림책 <오징어와 검복>은 검고 힘센 복어에게 자신의 뼈를 빼앗긴 오징어가 제 뼈를 찾기 위해 노력해가는 이야기다.
"오징어는 오랫동안 뼈가 없이 살았네.오징어는 뼈가 없어 힘 못 쓰고, 힘 못 써서 일 못하고,일 못하여 헐벗고 굶주렸네.헐벗고 굶주린 오징어는 생각했네.'남들에게 다 있는 뼈, 내게는 왜 없을까?'"- <오징어와 검복> 중에서 시인 백석에게 '뼈 없는 오징어'는 자주독립을 염원하는 식민지 조선이자 줏대 있는 삶을 지향하는 진취적인 사람이다.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대해나가는 삶의 자세와 태도. 백석은 식민지 어린이에게 그렇게 몽환(夢幻)의 환상 대신 적극적인 도전과 개척의 자세를 주문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런 줏대 있고 진취적인 자세는 나라안팎의 위기와 소란으로 의기소침해있고 꿈을 잃어가고 있는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와 태도가 아닐까.
'남들에게 다 있는 뼈가 왜 내게만 없을까'하고 고민하는 오징어의 모습은 문제의 실상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강조한다. 그리고 자신의 뼈를 빼앗아간 극악무도한 검복에게 당당하게 "내 뼈를 돌려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기백은 빼앗긴 주권을 침해받지 않으려는 시민의 기본 자세다.
순순히 자신의 뼈를 돌려주지 않으려는 검복에 맞서 먹물을 뿌리며 저항해서 싸우고, 이웃 물고기들과 함께 연대해서 검복의 횡포에 맞서는 오징어의 이야기는 비단 오래전 남의 일 같지만 않다. 아프더라도 싸워야 한다. 그래야 빼앗긴 것 하나라도 찾아올 수 있다. 함께 싸워야 한다. 그래야 서로가 귀하고 또 귀한 존재인 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