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살 낀 몽상가, 인도에 혹하다

[서평] 채유희 여행 에세이 <로맨틱 인디아>

등록 2009.01.14 18:00수정 2009.01.14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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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온전한 개인으로서의 이야기를 접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항상 굴곡 진 역사와 문명,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의 깊은 성찰을 위한 매개체로만 이용되었을 뿐, 개인은 그 자체로 빛나는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군대와 학교, 가족, 직장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담합해 만들어낸 이 전체의 위력은 예나 지금이나 상당하다. 그들에게 헌신하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지고, 그 과정에서 개인은 그저 전체를 위한 일부분이거나 조연 수준에 그친다. 

 

그러니 개인의 순수하고 소소한 욕망과 일상에 대한 이야기가 큰 주목을 받기 어려운 것도 당연한 일. 자신이 아닌 단체와 조직의 이윤과 성장을 위해 일평생을 헌신한다는 것은 철저한 개인주의자들에게는 더 없이 가혹한 형벌이다.

 

a  책 <로맨틱 인디아 : 채유희 여행 에세이>

책 <로맨틱 인디아 : 채유희 여행 에세이> ⓒ 달

책 <로맨틱 인디아 : 채유희 여행 에세이> ⓒ 달

<로맨틱 인디아>의 저자에게도 현실은 그러했던 모양이다. 명문대 졸업에 영국유학, 거기에다 못 하는 게 없는 팔방미인이었지만 조직 생활 적응만은 쉽지 않았던 그녀는 내면에서 꿈틀거리며 흘러넘치는 감수성과 상념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러다 자신을 등 떠미는 바람을 만났고, 그녀는 그걸 핑계 삼아 여행에 나섰다. 이 몽상가의 피난처는 전혀 로맨틱하지 않은 나라, 인도였다.

 

사진과 글이 함께 담긴 여행 에세이 <로맨틱 인디아>의 저자는 어설픈 듯 보이지만 매력적인 감수성으로 무장한 채 속삭이듯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글이 정제되어 있지 않은 채 제멋대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지만 대신 감수성 가득한 사진들이 책 전체의 매력을 또렷하게 살려주며 절묘하게 균형을 맞춘다.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글보다는 사진이 더 매혹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조건이란 조건은 다 갖춘 것 같은 저자는 외국계 기업 홍보실, 호텔리어, 패션 등 그럴 듯해 보이는 직장생활을 모두 다 마다하고 잠시의 주저함도 없이 바람을 따라 여행을 떠났다. 흔히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이곳저곳 떠도는 사람을 보고 '역마살(늘 분주하게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게 된 액운)이 끼었다'고 표현하는데, 그녀가 손에 쥔 패에는 아마 이 액운이 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일탈에서 시작한 어느 몽상가의 내면여행

 

20, 30대 여성 블로거들의 포스트에는 사진과 감상적인 글로 장식된 여행 글을 유난히 많이 볼 수 있다. 일본, 인도, 베트남, 유럽, 남미에 이르기까지 낯선 풍광을 찾아 기꺼이 안정된 삶을 포기하는 그들의 글에는 매일 똑같은 시간표대로 움직이는 지리멸렬한 일상에서 일탈하고픈 욕망이 가득하다. 이 책의 저자 또한 낯선 나라의 거리와 사막을 헤매며 끊임없이 꿈꿀 수 있길 소망한다.

 

"낙타는 맹물을 마시면 술을 마신 것처럼 취하게 되기 때문에 소금물을 좋아한다고 해. 술도 없는 사막에서 낙타처럼 물만 먹고 취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본문 236쪽)

 

저자는 아마도 꿈에 취하고 싶다는 말을 하려던 게 아닐까. 전쟁 같은 하루하루에 술 한 잔은 꼭 필요하다는 누군가처럼, 그녀는 아마도 술 대신 꿈을 선택했을 것이다. 명상의 나라라는 환상과는 다르게 더 없이 더럽고 지저분한 인도의 거리에서 그녀가 마주친 건 다름 아닌 '백지상태'로의 자기 자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누군가에 의해 이끌리지 않고 스스로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가슴 뛰는 삶을 살아보기 위해서라고 스스로 격려하면서.

 

"길 위에 사기꾼만 가득한 것 같다가도 춤을 추는 사람이 등장하고, 소음만 가득한 것 같다가도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온다. 길 위에서 무엇을 만나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보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곳. 외국인의 눈에 인도는 알 수 없는 곳." (본문 302쪽)

 

저자는 책에서 인도를 이렇게 묘사한다. 하지만 어디 이런 모호한 표현에 적합한 나라가 비단 인도뿐이랴. 남미나 아프리카 혹은 유럽의 어느 곳을 방문해도 만날 수 있을 이런 풍광에서의 감흥은 결국 이 책의 특징을 나타내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러니까 '로맨틱 인디아'는 곧 '로맨틱 내면여행'이 되는 셈이다.

 

다음 패를 예측할 수 없는 우연으로 이루어진 시공간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우린 우리의 운명을 온전하게 결정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매번 예측하지 못했던 뜻밖의 상황과 마주서야 한다. 저자가 여행에서 배운 게 있다면 그건 바로 그런 삶에 당당하게 맞서는 용기였을 게다. 낯선 도시에서도 주저하거나 두려움 없이 거침없는 여행자의 모습을 보여주던 그녀는 결국 말미에서 번뜩이는 가로등과 만나고 이런 고백을 한다. '너무 늦었어. 이제 돌아갈 시간이야.'

 

현실이라는 틀 안에서 조직과 전체를 개개인이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자신 스스로를 바꿀 수는 있다. 그건 쉽지 않지만 충분히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저자는 <로맨틱 인디아>의 여행을 통해 그것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이 역마살 낀 몽상가가 인도에 혹할 수 있었던 건 바로 그 찌릿찌릿한 변화 때문이 아니었을까.

2009.01.14 18:00ⓒ 2009 OhmyNews

로맨틱 인디아 - 채유희 여행 에세이

채유희 글.사진,
달, 2009


#로맨틱인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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