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비 빌려 주는 사람이 어딨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못의 귀향>

등록 2009.01.29 19:25수정 2009.01.30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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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철 시집 <못의 귀향>
김종철 시집 <못의 귀향>시학
김종철 시집 <못의 귀향> ⓒ 시학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란 사십대 이상의 남자들은 못을 가지고 논 적이 많을 것이다. 그중 못치기는 사내아이들의 주요놀이 중 하나였다. 틈만 나면 우리들은 반듯한 못의 끝을 숫돌에 날카롭게 갈고 갈아 뾰족하게 만들었다. 구부러진 못은 망치와 돌멩이로 더욱 구부려 못의 형상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만들어 못 따먹기를 했었다. 해서 우리 꼬맹이들은 못을 구하기 위해 공사판 부근을 서성거렸고 어쩌다 괜찮은 못이라도 발견하면 은근한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웬 못타령이냐고? 조금은 특이한 제목의 시집을 만나서이다. 올해로 등단 40주년이 되는 김종철 시인이 <못의 귀향>이라는 시집을 세상에 내놓았다. 제목만 봐서는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이 단순히 '못'과 관련된 시 모음집 정도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시를 끝까지 읽고 나면 못은 60여년의 세월 동안의 삶속에서 박히고 찧이고 뽑히면서 살아왔던  시인 자신이고, 못의 귀향은 잃어버린, 아니 기억 속에 묻어있던 어린 시절과 어머니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의 회향임을 알 수 있다.

 

문학평론가 김재홍은 그의 이번 시집의 시편들을 두고 '60소년 떠돌이 시인의 참회록'이라고 말하고 있다. 참회록이라 해서 지난 삶에 대한 반성이라기보다는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움, 고향과 어머니, 그리고 아내에 대한 상념들이 몇 가지 상징적 단어들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특히 '초또마을 시편'이라는 연작시들은 간난과 아픔으로 이어진 어린 시절의 애틋한 풍정들이 소박한 언어들로 채워져 있다.

 

어머니 등에 업힌 나는

칭얼대면서 마실을 다녔습니다

가는 곳마다 손님 오셨다고 맞아 주었는데

상갓집에도 갔습니다 (중략)

짓무른 온몸은 꼬들꼬들해지더니

시루떡 팥고물 같은 딱지로

소복이 떨어져 내렸습니다

마마 손님이 떠나간 것입니다

- '손님 오셨다' 부분

 

어머니는 마마에 걸린 날 업고 이 동네 저 동네 마실을 다녔다. 상갓집에도 갔다. 난 그렇게 어머니 등에 업혀 떡도 얻어먹었다. 그래서 그런지 손님은 떠나갔지만 평생 일생을 따라다님을 노래하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대가 끊기든 말든 제 팔자거늘

지아비 빌려 주는 사람 어딨어!

-누가 들을라

듣는 게 대순가 (중략)

아버지를 눈물로 간청했습니다

하루 이틀, 몇 달 빌고 빌어서

딱히 여긴 어머니는

착한지 바본지 알 수 없는 아버지를

이웃집 연장 빌려주듯 덜컥

좋은 날 잡아 동침시킨 모양인데

하필 계집애가 태어날 게 뭡니까?

그때 어머니 나이 갓 서른

- '문고리 잡다' 부분

 

참 재미있는 아니 황당하면서도 아픈 시이다. 경험이다. 어머니와 가깝게 지낸 여인을 위해 어머니는 아버지를 빌려준다. 그것도 사정을 하면서 그 여인과 하룻밤 자게 한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이복여동생, 그러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런 슬프다면 슬픈 이야기를 시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조금은 해학적인 말투로 풀어내고 있다.

 

유년 시절 어머니가 사 남매 키운 밑천은

국수장사였습니다

부산 충무동 좌판 시장터에서

자갈치 아지매들과 고단한 피란민에게

한 그릇씩 선뜻 인심 썼던

미리 삶은 국수 다발들

제때 팔리지 않은 날은

우리 식구 끼니도 되었습니다

- '국수' 부분

 

밑에 깔린 형은 코피까지 흘렸습니다

짓눌린 까까머리통에 뾰족한 돌멩이가 못 박혀 있었습니다

어금니를 깨문 채 쏘옥 눈물만 뺀 형,

새야, 항복캐라, 마 졌다 캐라!

여섯 살배기 나는 울면서 외쳤습니다

- '마, 졌다 캐라' 부분

 

나이가 들수록 유년의 추억들은 새로운 모습으로 되살아나 나이든 정신을 잡아놓곤 한다. '초또마을 시편'이라는 연작시 속에 들어있는 시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들 시편엔 다양한 풍정들이 드러난다. 익숙한 모습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들도 있다.

 

인용한 시 '국수'에선 가난한 유년시절의 모습이, '마, 졌다 캐라'에선 골목대장이었던 형에 대한 추억이 소박한 풍물처럼 펼쳐진다. 또한 오줌싸개 추억, 한량이었던 외삼촌에 대한 추억,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 한 동네에서 살았던 복태 아버지와 동네 사람들 이야기 등이 아스라한 안개비처럼 펼쳐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꽃이 지고 있습니다 / 한 스무 해쯤 꽃 진 자리에 / 그냥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 '봄날은 간다' 한 부분

 

'당신 몸 사용 설명서'라는 부제가 붙은 2부 시편들과 3부 4부의 '순례시편'이나 '창가에서 보낸 하루'의 시편들에선 가버린 젊은 날에 대한 아쉬움과 육십줄에서 느끼는 깨달음, 아내에 대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그리고 못과 망치로서 살아온 삶에 대한 것들이 하나는 추억담으로 하나는 현실로 그리고 새로이 시작될 새로운 삶의 모습으로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시인은 <못의 귀향>에서 잃어버린 시간들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잃어버린 시간을 노래함으로써 떠나온 고향으로 다시 돌아감을 노래하고 있다. 그래서 그 속에 숨어있던 다양한 추억담들, 가난과 아픔과 슬픔들이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시인에게 잃어버린 시간은 사라진 시간이 아니라 현재의 시간이고 미래의 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종철 시집 <못의 귀향> / 값 10,000원 / 시학

2009.01.29 19:25ⓒ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김종철 시집 <못의 귀향> / 값 10,000원 / 시학

못의 귀향

김종철 지음,
시학(시와시학), 2009


#못의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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