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사람' 이재호의 '일연 스님 스토킹'

<삼국유사를 걷는 즐거움>... 800년 만에 되살아난 일연의 미소

등록 2009.02.03 10:19수정 2009.02.03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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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유사를 걷는 즐거움>의 저자 이재호.
<삼국유사를 걷는 즐거움>의 저자 이재호.조경국
경주 배반동 효공왕릉 근처에 가면 호젓하게 자리한 한옥 네 채를 만날 수 있다. 수오재(守吾齋)란 곳이다. '나를 지키는 집'이란 뜻으로, 다산 정약용의 글 <수오재기>(守吾齋記)에서 따왔다고 한다. 근방에 천년고도의 증인들인 선덕여왕과 신문왕, 효공왕 등이 누워 있고 뒷동산에는 고즈넉한 솔숲과 대숲이 이 집을 포근히 감싸주고 있다.

수오재(守吾齋) 주인장 이재호는 '한옥 옮겨 짓는 사람'이다. "자연과 인간, 문화유산의 감동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1994년 삶의 터전을 아예 경주로 옮기고는 마산, 칠곡, 영천 등지의 한옥 고택을 옮겨와 이곳에 복원하기 시작했다.


수명을 다했다는 현대인들의 성급한 판단 때문에 그리고 도로, 공단, 수몰 예정 지역에 위치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라질 운명이었던 수백 년 기왓장과 대들보, 대청마루에 그가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은 것이다. 최근엔 전북 김제에서 고택 한 채를 더 옮겨와 초석, 입주 작업을 마치고 1월 중순 상량식을 열었다고 한다.

이재호는 또한 '걷는 사람'이다. 스스로 '기행전문가', '기행작가'라 칭한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초대 총무를 맡은 1987년부터 유홍준 교수(전 문화재청장) 등과 함께 전국을 돌아다녔다.

전 세계적으로 한 왕조가 천년을 지탱한 나라는 신라와 로마뿐. 그는, 스스로 밝히듯 "어릴적 동경의 세계였고 아득한 신비의 세계"였던 '경주'에 천착하기 시작한 뒤로는 '경주 지키미', '경주 알리미'를 자처하고 있다. 지금도 전국의 많은 학자들과 동호인들이 경주에 오면 그를 앞세우곤 한다. 이영훈 국립경주박물관장은 그를 일컬어 '노천 박물관장'이라고까지 했다.

경주알리미와 함께 일연스님 발자취 따라 걷는 즐거움

 <삼국유사를 걷는 즐거움>에 담겨있는 100여 장의 사진 중 단 한 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재호 본인이 직접 찍은 것이다. 사진은 진평왕릉에서 찍은 석양
<삼국유사를 걷는 즐거움>에 담겨있는 100여 장의 사진 중 단 한 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재호 본인이 직접 찍은 것이다. 사진은 진평왕릉에서 찍은 석양한겨레출판

이재호가 '걷는 즐거움' 시리즈 두 번째 책을 세상에 내놨다. 지난 2005년 출간한 <천년고도를 걷는 즐거움>이 '경주 길라잡이'였다면 이번에 낸 <삼국유사를 걷는 즐거움>(한겨레출판)은 독자를 역사로 초대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일연 스님과 독자들을 매개하는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2006년은 일연 스님이 탄생한 지 꼭 800년이 되던 해였다. 이재호는 그해 봄,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완성하고 마지막 입적했던 경북 군위 인각사를 시작으로 1년 6개월간의 길고 먼 기행길, '일연 스님 스토킹'에 나섰다. 일연 스님의 흔적을 차분하고 겸허하게 쫓은 수행길, 그의 열정에 감복한 일연 스님이 800여 년 만에 다시 살아나 책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온다. 이재호의 글을 읽는다기보다 일연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 책은 그동안의 경직된 '기행문'과는 많이 다르다. 일연 스님이 '찍어두신' 지명을 찾아다니는 데 그치지 않고 저자의 감상과 주관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이재호와 일연 스님의 '역사 대화'가 책 곳곳에서 이어진다.


"천천히 걸어 제일 뒤에 있는 진흥왕릉으로 갔다. 신라 최고 정복왕의 능치고는 너무나 초라하여 노동동의 봉황대를 진흥왕릉으로 본 석당 최남주의 견해를 따르고 싶다……. 진흥왕릉은 내가 본 수많은 신라왕릉 중 가장 탄력이 없고 울퉁불퉁했다. 이 쭈글쭈글한 능을 보니 갑자기 자식새끼를 키운다고 온갖 고생을 다하고 상처뿐인 영광으로 쭈그러져 버린 우리네 어머니의 젖가슴 같아 마음이 아리다. 멀리서 산사의 종소리가 들린다. 아, 진흥왕도 음악에 일가견이 있었지..." ('정복왕 진흥왕과 사랑의 흔적' 중)

"진전사지 3층 석탑으로 갔다. 석탑은 미끈하면서 단정한 아름다움을 풍긴다. 외로움에 지쳐 있던 잡초 우거진 옛 모습이 그립고, 내 청춘이 꿈틀거릴 때 같이 왔던 아름다운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어린 일연 스님, 청춘의 일연 스님이 맑은 미소를 보낸다. 자신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찾아주어 고맙다고. 나는 당신의 흔적을 맴돌다 말았는데..." ('진전사지와 낙산사' 중)

"정림사지 석탑을 찾았다. 앞에서 옆에서 뒤에서 명작을 보고 또 보았다. 참 아름다운 탑이다. 사뿐사뿐 보드라운 새색시의 발걸음 같이, 봄 들판 저만큼에서 나풀거리는 아지랑이처럼 부드럽다. 말 그대로 백제의 대표선수였다. 어쩜 저리 곱고 부드러우면서도 매혹적인지... 660년 7월 온 백제가 불타며 울부짖을 때 석탑이 토해냈을 슬픔과 하염없는 눈물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하다." ('아련히 그리운 내 마음의 백제' 중)

노천박물관장의 발품, 돋보이네

 이재호는 책 곳곳에서 우리의 문화재 수준에 대해 개탄한다. 원성왕 대의 화랑 김현과 호랑이 처녀의 사랑 전설이 배어있는 호원사지는 이렇게 방치되어 있다.
이재호는 책 곳곳에서 우리의 문화재 수준에 대해 개탄한다. 원성왕 대의 화랑 김현과 호랑이 처녀의 사랑 전설이 배어있는 호원사지는 이렇게 방치되어 있다.한겨레출판

법흥왕, 진흥왕, 진평왕, 성덕여왕, 진덕여왕 등 신라를 지켜낸 왕들의 사연도 아련하지만 <삼국유사>에 거론된 신라 뭇 중생들의 아스라한 삶과 사랑도 저자 특유의 방식으로 흥미롭게 풀어내고 있다. 몸에서 향내가 났다는 신라 제일의 미녀 김정란, 진지왕과 도화랑의 생사를 넘나든 사랑, 신라 최고의 예술가 양지 스님, 광덕과 엄장 두 남자의 아내가 된 여인 등 전설 같은 이야기가 빼곡하다. 널리 알려진 만고충신 박제상과 그 가족의 사연, 헌강왕과 <처용가>, 수로부인과 <헌화가>, 김대성과 불국사에 얽힌 이야기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뭐니뭐니해도 이 책의 백미는 저자의 '발품'이다. '노천박물관장'이라고까지 불리는 그였지만, '기자들이여 반성하라'고 타이르듯 노트와 사진기를 들고 전국 곳곳을 다시 누볐다. 책에 삽입된 100여 장의 사진 중 단 한 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가 직접 찍은 것이다. 이재호는 서문에서 "비록 수백 번 갔던 곳이라도 눈비가 몰아치고 몸이 아프고 마음이 아파도 미리 써놓지 않고 매주 현장을 찾아가서 쓰겠다는 독자와의 약속을 지켰다"며 뿌듯해했다.

그는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완성하고 입적했던 경북 군위 인각사에서 이 작업을 시작했고, 일연 스님이 처음 출가했던 강원도 양양 진전사에서 끝맺는 등 겸손하게 과거로 뛰쳐 들어갔다.

김현과 호랑이 처녀의 영혼을 울리는 사랑 이야기('호랑이 처녀의 숭고한 사랑')를 쓰기 전에는 역사의 기록에 따라 음력 2월 8일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흥륜사와 호원사지로 갔다.

삼국유사 완성한 인각사에서 시작, 출가한 진전사에서 끝맺음

 '걷는 사람' 이재호는 <삼국유사를 걷는 즐거움>을 통해 800여 년 전 일연 스님을 불러낸다.
'걷는 사람' 이재호는 <삼국유사를 걷는 즐거움>을 통해 800여 년 전 일연 스님을 불러낸다.한겨레출판

황룡사 정수 스님이 얼어죽기 직전의 거지 여인과 아기를 구해주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서는 일부러 추운 겨울을 기다렸다는데, 이에 대한 뒷얘기가 재밌다.

1200년 전 서라벌의 눈 쌓인 어느 겨울 날, 정수 스님이 삼랑사에서 황룡사로 돌아오는 길에, 어느 거지 여인 하나가 어린아이를 낳고는 얼어서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정수 스님은 그것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여 옷을 벗어 덮어주고 벌거벗은 채 절로 달려와 거적으로 몸을 덮고 밤을 지냈다는 것이다.

이재호는 1200년 전 정수 스님이 되어 보려고 했다.

"정수 스님은 헐벗은 여인을 위해서 천엄사서 옷을 벗어주고 이곳 황룡사까지 달려왔는데 나는 코트까지 입고 얼마나 편안하고 행복하게 왔는가. 그 지극한 옷보시를 몸소 느껴 보려고 바지와 팬티를 벗고, 코트 스웨터 러닝셔츠를 벗고, 중문을 지나 경루와 종루 사이로 황룡사 목탑 터를 향해 달렸다. 정수 스님의 이야기는 오늘날 같으면 9시 뉴스에 훈훈한 미담으로 보도될 것이고, 지금 나의 행동은 어느 이상한 사람이 달밤에 체조했다고 신문의 가십거리도 안 되고 노란 신문에만 대서 특필될 것이다..." ('얼어 죽는 아기와 여인 구한 정수 스님' 중)

장춘랑과 파랑, 두 화랑의 넋을 기린 장의사(壯義寺) 터인 서울 세검정 초등학교를 찾았을때는 문이 꼭 닫혀 있는 바람에 월담을 감행, 운동장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당간지주에 볼을 부비고 돌아오기도 했다. 장대하면서도 기구한 우리 역사를 만지는 저자의 마음가짐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부석사와 월명사, 불국사, 백률사, 원원사지, 천룡사지, 단속사, 대릉원, 분황사 등 <삼국유사>가 전하는 역사의 현장에 갈 때는 이 책을 지참하는 게 좋겠다. 짧은 문장으로 갈음하고 있는 문화재 안내판 읽는 것 대신 이 책 펼쳐 톡톡 두드리면 일연 스님이 걸어나와 그윽한 역사의 현장으로 안내할 것이다. 일연과 이재호의 발자욱에 우리의 발자욱을 하나 더 포개는 것이다.

이재호는 이 책을 짓고는 다시 한옥 옮겨 짓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올 봄이면 또 한 채의 한옥 고택이 경주의 햇살을 받게 된다. 경주에 가면 수오재(守吾齋)에 들러볼 것을 권한다. '천년고도'와 '<삼국유사>' 못잖게 그의 집 안마당을 걷는 '즐거움'도 쏠쏠하고, 이재호의 애절한 단소 연주도 들을 수 있다.

끝으로 퀴즈 한 가지.

신라 진흥왕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공통점은? 책에 나온 '정복왕 진흥왕'의 흔적을 좇다 보면 그 정답을 알 수 있다.

 수오재 전경
수오재 전경전관석

삼국유사를 걷는 즐거움 - 이재호와 함께 천년 침묵의 미(美)를 만나다

이재호 지음,
한겨레출판, 2009


#삼국유사를걷는즐거움 #이재호 #삼국유사 #한겨레출판 #수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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