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을 든 신부님들100분도 넘는 신부님들을 보며 뜨거운 감격을 맛보았다. 촛불을 들고 있는 신부님들의 모습은 그대로 예수님을 안고 있는 형상으로 내게 보였다.
지요하
신춘문예로 맺은 동아일보의 연을 끊기까지나는 문득 눈을 들어 제대 너머에, 자못 위압적인 형태로 서 있는 동아일보 사옥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하늘 높이 서 있는 실로 걸판진 모습이었다. 서남쪽으로 대각선상에 서 있는 조선일보 사옥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서로 먹이경쟁을 하면서도, 거짓과 왜곡과 혹세무민의 영역이 날로 축소되어 가는 상황에서도, 경쟁적으로 그 입지를 유지시키기 위해 어깨동무를 한 채로 안간힘을 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의 허위 큰 모습은 더럭 안쓰럽고도 측은한 본새다.
나는 또 문득 청년 시절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저 신문사들의 신춘문예를 잡기 위해 얼마나 열병을 치르며 통한의 눈물을 쏟았던가. 원고 마감날 지방에서 부랴부랴 올라와서 원고를 접수시킨 때도 있었고, 마감이 며칠 지난 뒤에 찾아가서 통사정을 한 적도 있었지.
그러다가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간신히 잡았다. 전두환 군사정권 초기, 참으로 엄혹했던 시절이었다. 80년 광주의 비극을 '추상적'으로 다루면서 당시의 시대상황을 상징적인 기법으로 그려낸 중편소설이었다. 심사위원(최인훈/유종호)들이 고민을 많이 했노라고 했다. 오래 고심하다가 "이런 이야기를 쓰는 사람도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이 소설을 뽑지 않을 수 있느냐"는 말이 나와서 결정을 했노라고 했다. 그리고 지면 발표에 필요한 모든 사항을 신문사에 위임했다고 했지.
그래서 동아일보사는 나를 불러올렸고, 편집국장과 문화부장이 나를 가운데 끼고 앉아서 뼈와 살의 일부를 발라내는 일을 했지. 여기저기에서 몇 줄씩 걷어내고, 한 부분은 통째로 20여매 분량을 도려내기도 했지. 그래서 내 등단작품 <추상의 늪은>은 315매 소설이 290매로 축소되고 상처를 많이 입은 상태로 <신동아>에 발표되었지.
그래도 나는 동아일보를 사랑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 출신 작가라는 자부심도 적당히 챙기며, 동아일보의 애독자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1975년 동아일보 '광고탄압' 때는 두 차례나 '격려광고' 대열에 실명으로 참여했고, 동아일보가 광고탄압에 굴복한 이후에도 지역에서 동아일보 구독자를 하나라도 더 늘리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동아일보 지면에 소설가 이외수씨 다음에 크게 소개된 적도 있고, 문화면 고정 칼럼인 '청론탁설'을 한 주에 한 번씩 두 달 동안 집필한 적도 있고, 동아일보를 아끼고 돕는 태도를 오랫동안 유지했다.